표절을 보호해야 한다
작가의 창조성이란 사회와 역사를 비롯한 외부와의 교섭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가 받았던 교육과 독서 편력도 거기에 포함된다. 표절은 도덕적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와 즐김의 대상이다.
시사인 (401호)
원래는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 표절>(여름언덕, 2010)을 자세히 읽어야겠지만, ‘신경숙 사태’가 불러온 두 가지 쟁점부터 말하고자 한다. 먼저 ‘문학 권력’ 논쟁은 추상적이다. 현재 문학 권력 논쟁을 주도하며 3사(창비·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를 성토하는 교수 겸업 평론가들은 한때 그 자신이 문학 권력이거나 그 가까이에 있었다. 오늘도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능력껏 문학 권력을 행사 중인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문학 권력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우습다. 이들이 제시한 문호 개방이니 인적 청산이니 하는 해결책은 정치나 공공 분야에서 강구될 수 있는 것일 뿐, 스스로 뭘 해보겠다는 강력한 신생(新生)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문학 권력에 떠밀려 문단의 주변인이 되고, 끝내는 문학에 대한 열의마저 식고 말았다는 논쟁 주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15년 전 동일한 논쟁에 불을 지폈던 그때 그 ‘나물’이다. 이들은 그동안 <녹색평론>(김종철)이나 <애지>(반경환)와 같은 거점을 만들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여러 논쟁을 보면, 어묵 국물 우려먹듯이 같은 논쟁이 계속 공회전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벌어진 문학 권력 논쟁도 새로운 담론과 실천 없이는 조선 시대의 예송 논쟁처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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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
문학 권력보다 더욱 까다로운 논쟁이 표절이다. 표절 논쟁의 가장 나쁜 결과는 이번 사태로 한국 작가의 위상이 추락하는 게 아니라, 그 위상이 한층 신격화되는 것이다. 신경숙 사태 직후 일반 독자는 물론 문학 전문가라는 평론가들까지 나서서 ‘작가는 한 문장, 한 단어, 모두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만 쓸 수 있다’라고 을러댄다. 이렇게 말하는 평론가와 독자는 ‘작가=창조자’라는 케케묵은 낭만주의 신화의 희생자들이다. 18세기에 시작된 낭만주의 운동은 창조와 개성으로 무장한 작가의 탄생을 강조하지만, 낭만주의 운동이 대규모 표절 운동이기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창조하는 작가’라는 낭만주의 신화는 기원에서부터 오염되었다.
창작의 산실은 ‘스스로 하기(DIY)’의 작업장이 아니라 무한 재사용(reuse)이 벌어지는 곳이다. 보르헤스의 발상을 빌려오자면, 표절과 창작은 ‘1대1 지도(地圖)’이며, 문학을 하기 위해 표절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표절을 창조의 일부가 아닌 범죄로만 보는 편견은, 무한 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으로 폐색된 이 시대의 보수성이 작가의 표절을 ‘무임승차’와 ‘불로소득’으로 단죄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낳는다. 이런 족쇄는 창작을 제약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역설적이게도, 독자들이 저 등식(작가=창조자, DIY)을 떠받들면 떠받들수록 작가들은 마치 자신이 신이기라도 한 양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강조컨대 작가의 창조성이란, 사회와 역사를 비롯한 외부와의 교섭에서 나온 산물이며 그가 받았던 교육과 독서 편력도 거기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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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표절> 피에르 바야르 지음백선희 옮김여름언덕 펴냄 |
표절을 윤리적이게 하는 것은 명시성(출처 표시)이 아니라 원본을 빌려 쓴 사람의 원본과의 대결 의식이며 원작을 극복하려는 노력, 곧 작품성이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하고 지붕에 오르면 사다리가 필요 없듯이, 표절이 완수되었을 때 명시성은 중요하지 않다. 경계할 것은 삼류 표절작이 원작의 권위에 기대고자 명시성을 이용하는 사례다. 나는 오래전에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라는 시를 쓴 바 있는데, 제목 아래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던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표절은 도덕적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와 즐김의 대상이다. 아직 문학의 성년(成年)이 되지 못한 ‘문학소녀’만이 의식적인 표절을 해놓고도, 표절을 더러워하는 자기기만 속에 허우적댄다. 그래서는 모던(modern)을 성취할 수 없다.
문학이 남겨둔 1%의 빈 공간
피에르 바야르는 <예상 표절>에서 표절을 감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한다. 첫째, A(원본)와 B(표절작) 사이에 반드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유사성이 있더라도 B가 애초부터 A를 베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면 표절로 성립되지 않는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의 경우, 부제가 있든 없든 김춘수의 ‘꽃’이 원본이라는 것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표절작이 될 수 없다. 은폐성 혹은 은폐 시도가 표절을 구성하는 것이 맞다면, 물증이 드러난 표절 작가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대처는 일단 ‘A를 읽었다’고 자백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러나 A와 B 사이에는 이러저러한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수습하면 된다. 과연 이런 해명이 최상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읽지 않았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지은이의 책이 늘 그랬듯이, <예상 표절> 또한 문학에 대한 고루한 생각을 떨치게 해준다. 표절은 항상 A가 먼저 있고 B가 그 뒤를 따른다. 이 원칙을 지배하는 것은 선형적 시간이다. 다시 말해 장정일이 이상을 표절(‘고전적 표절’)할 수는 있어도, 이상이 장정일을 표절(‘예상 표절’)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은이는 문학에서는 다양한 층의 시간이 혼거하며 가역적 시간마저 가능하다면서, 문학 작품에 세심히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선형적 문학사에 바탕한 ‘고전적 표절’보다 ‘예상 표절’을 발견하고 감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학이 영속해온 비밀은 그 어떤 주류가 99%를 점거하고 있더라도, 비주류가 차지할 1%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례가 잘 보여주었듯이 정치는 그 1%조차 남겨두려고 하지 않지만, 문학은 1%의 ‘빈 공간’을 언제나 남겨둔다. 정치에서는 1%가 주류가 되는 변태가 절대 없지만, 문학사에서는 예삿일이다. 어떤 문학 권력도 이 흑점을 없애지 못한다.
3사가 내 책을 내주지 않는 것이 고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의 독자는 <죄와 벌>과 <성>을 읽을 뿐,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가 거래했던 출판사에 관심이 없다. 신경숙이나 귀여니나 살아생전 글로써 생계를 잇고 있는 것이지, 아직 ‘작가의 삶’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작가의 삶은 그들이 죽고 나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명성’이라고 잘못 알려진 작가의 삶은 대개 육체적 죽음과 함께 피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이처럼 엄혹한 문학적 진실 앞에서 문학 권력으로 지목된 3사가 부릴 수 있는 야료는 대수롭지 않다. 나는 이응준을 지지하는 한편, 이렇게 말한다.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
장정일
<실천문학>(2015년 가을호)‘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을 ‘창조’라고 사전은 말한다. 하지만 그런 창조는 한번도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래된 그리스 신화는 창조를 ‘혼돈(chaos)에서 질서’가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며, 유대-기독교 전통 역시 창조를 ‘혼돈으로부터의 분리’라고 말한다. 이때의 ‘혼돈’은 ‘무’일 수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잘 알려진 관용구는 결코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무는 그 어느 기원, 그 어느 장소에서도 실재한 적이 없다.신경숙 사태 이후, 글쟁이들 가운데서 ‘나도 표절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예컨대 여성학 강사 정희진은 모 월간지에 기고했던 자신의 글 가운데 한 문장(“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가 짐승의 발자국이라면, 몸은 첫 번째 인식 도구였다.”)이, 소설가 정찬의 최근작에서 몰래 따온 것(“인간이 본 최초의 언어가 무언지 아나?”, “짐승의 발자국이었어.”)이라면서, “소설가 정찬의 표현에 의하면”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작가에게 용서를 구했다. 정희진이 자신의 죄(?)를 자복했던 ‘표절 이후의 사회’라는 칼럼 제목이 내게는 ‘표절 이후의 광풍(狂風)’으로 읽힌다.정희진은 글쓰기 혹은 창작을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으로 옹호하면서, 창작과 글쓰기 공간에서 혼돈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는 기세다. 하지만 정희진이 용서를 구하고자 했던 정찬의 문장이 정작 정찬만의 고유한 표현이 아니라면 어쩔 텐가? 새와 짐승 발자국이 그림 글자가 되고 한자가 되었다는 얘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았던 것이다. 또 정찬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동물 다큐멘터리 영화나 도감에서 그와 유사한 인식을 빌려왔거나 변주했을 수도 있다. 설사 저것이 실제로 정찬의 것이어서 허락을 맡거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정도라면, 정희진이 쓴 원고지 11장 분량 글 가운데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말과 활> 8~9월호와 <실천문학> 가을호는 ‘신경숙 사태’로 불거진 표절과 문학 권력을 특집으로 삼았다. 이들은 표절과 ‘문학 권력’의 추한 민낯을 드러내는 데는 열성이었으나, 계몽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 주장은 신경숙이 표절하지 않았다거나, 그것을 감싸는 노회한 문학 권력이 없다는 게 아니다. 영향과 모방은 물론 페스티시·인용·인유·패러디가 혼재되어 있는 문학 자체에 대한 고뇌와 추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 논의를 빠뜨리면 누군가가 신경숙을 검찰에 고발했을 때처럼, 문학계는 ‘현택수는 문학을 모른다’, ‘문학은 문학 하는 사람들만이 안다!’라는 동어 반복밖에는 더 할 말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