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심경호 지음/알마·7만원“1453년 10월18일 강화 찬 바다는 신음하고 있었으리라…. 시간은 멈췄다. 문사들과 시를 읊고 왕명의 일들로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날은 몽유에 불과했던 것일까. 깨고나면 등장인물의 윤곽마저 흐물흐물해지는 그런 꿈.” <안평: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들머리다. 죽음을 앞둔 안평대군의 심사를 매혹적으로 그렸다. 도원경을 꿈꾸다가 죽어간 멋쟁이 왕손의 비극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
안평대군 이용(1418~53)은 세종의 셋째 아들. 똑똑하고 감수성이 뛰어나 아비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의 온천행을 호종하고, 불사에 동참했으며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찬주분류두시> <동국정운> <의방유취> 등 신생국 조선의 밑돌 격인 책을 편찬했다. 글씨에 능하여 호방한 조맹부체는 한 조각을 얻으면 영광인 줄 알았다. 안평은 다섯 시대 화가 35인의 그림 222점을 소장하고 완상하였다. 마포의 별장 담담정에 1만권 장서를 갖췄다니 부러운지고. 또 인왕곡 깊숙이 무계정사를 일으켜 문단의 우두머리 구실을 했다. 자기 꿈을 안견으로 하여금 <도원도>를 그리게 하고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찬시를 엮은 것은 그러한 증거다. 아비가 죽고, 맏형인 문종이 일찍 죽으면서 벌판에 섰다. 수양대군은 대권 야망으로 끓어올랐고 똘똘한 안평대군은 경계 대상이 됐다. 담담정, 무계정사 모임이 음모로 분칠되고 결국 교동도에서 형이 보낸 사약을 마셨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다.
무계정사는 헐리고 그의 글은 불살라졌다. 반역죄를 제외하고 사서는 물론 족보에서 소거됐다. 정조 대에 이르러 제삿밥을 먹게 되지만 일부러 없앤 자취가 살아날 수 없는 일. 상당 부분 공백으로 남은 안평의 삶을 재구성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뚝뚝 끊어진 시간대는 물론 단절된 자료의 구멍을 메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 말랑말랑한 상상은 평전을 수월하게 읽히게 하는 시럽이 될 터이다. 지은이가 서두에서 짐짓 감상에 젖은 까닭이리라.
안평 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세종 29년, 1447년).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
김칫국이었다. 심경호, 그 이름 석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으련만…. 한문학자이며 문헌학자인 그는 일찍이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필진이 되어 두툼함으로 방향 잡은 이래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1999) <국문학 연구와 문헌학>(2002) 등 꼬장꼬장한 책을 써왔고 <한국한문기초학사>(2012)를 세 권으로 풀어냈다. <다산과 춘천>(1996) <김시습 평전>(2003) 정도가 그나마 쉽게 읽힌다. <안평>은 지은이의 저러한 행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대상 인물이 조금 대중적이라는 점.
지은이는 안평의 저작물이나 관련된 시문, 실록, 교유한 문사들의 시문들까지 모으고 중요한 것은 모두 번역했다. 안평의 삶에서 단절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상상력을 펼치기보다는 산일된 자료를 모조리 모아, 주제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전략이라면 성공이다. 전공과 부지런함의 구실은 톡톡하여, 데이터만으로 하나의 인물을 오롯이 되살려냈다. 서두 몇 문장에서 그쳤기 망정이지 멋쩍은 상상력은 책을 망쳤을지도 모르겠다.
지은이가 가장 많이 인용한 자료는 실록. 조선왕조실록이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도 않다. 특히 단종실록이 그러한데, 단종을 죽인 세조 진영이 기술했기 때문이다. 안평이 대신들한테 뇌물을 받았다든가, 문종이 죽자 안평은 즐거워했으며, 상제에 한번도 참여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술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든가, 심지어 양어머니와 상피 붙었다고까지 썼다. 단종이 대간들의 등쌀에 밀려 “조정의 의론에 따르겠다”고 하자 수양이 울면서 “왕의 친족에게 죽음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반역죄를 덮어씌운 마당에 무슨 짓인들 못할까. 지은이는 인용하되 믿기 어렵다, 사실과 다르다고 덧쓴다. 물론 <동각잡기> <해동야언별집> 등 다른 근거를 댄다.
책에서는 시문을 인용하면서 체제와 운을 갑갑할 정도로 따진다. 예컨대 微陽有佳色 萬物增彩光 何時日色大 明明照四方(희미한 태양에 멋진 빛깔 있어/ 만물에 광채를 더하네/ 어느 때나 햇빛이 커져서/ 밝고 밝게 사방을 비출꼬). 수양쪽에 의해 안평이 반역을 도모하려는 뜻을 품었다는 증거로 이용된 시다. 오언절구라고 하기에는 이웃 글자끼리 성조(평, 측(상, 거, 입))의 조화를 꾀하는 외재율을 어겼다. 두번째 연의 ‘物’과 ‘彩’가 측성자인데, 이는 두번째, 네번째 글자의 성조가 달라야 한다는 규칙에 어긋난다. 지은이는 안평의 한시 실력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누군가 날조했을 거라고 말한다.
편저를 분석하여 안평의 내면풍경을 재구하는데 이르면 무릎을 치게 만든다. 안평은 황정견 시로써 <산곡정수>를, 매요신 시를 뽑아 <완릉매선생시선>을, 왕안석 시를 모아 <반산정화>를 엮었다. 뽑은 시들은 기이하지 않고 평이한 가운데 뜻이 곡진한 점에서 같다. 예를 들면, <완릉시선> 첫머리의 ‘도자’. 陶盡門前土 屋上無片瓦 十指不霑泥 鱗鱗居大廈(문 앞 흙 다 긁어 기와 만들어도/ 자기 집 지붕에는 기왓장 하나 없고/ 열 손가락 깨끗한 사람은/ 으리으리 대저택에 사누나). 왕안석은 급진책으로 유명한데, 안평의 눈길은 오로지 그의 시가 자연스러움에 머물러 있다.
정점은 몽유도원도. 안견의 그림에서 장광설이 있을 법한데 대충 넘어간다. 대신 그림에 붙은 21개 찬문에 집중하는데, 방점을 찍어가며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모든 글이 형식과 내용 모두 당대 최고 수준임을 보여준다. 개중에 수양의 편에 선 자도 있지만 단종의 편에 선 이가 많다. 지은이는 안평을 포함한 이들의 정신세계를 ‘청백’ 두 글자로 요약한다. 안평이 야심가인가, 희생자인가라는 애초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다만 문학예술 모임 자체가 권력행위로 간주되었던 시대, 국왕의 아들이며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그의 행위는 목적이야 어쨌든 그 자체가 권력의 현시로 간주되었다는 점, 그것이 안평대군의 비극이 지닌 진정한 의미라고 말한다. “그의 35년 삶은 몽유로 규정해도 좋으리라. 그 꿈은 질척질척하여 깨어난 뒤 뒷맛이 씁쓸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
임종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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