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조만식 통역비서… 김일성 환영회서 즉흥詩 읊기도
1945년 해방 직후 백석의 행적에 대해서는 희곡 ‘맹진사댁 경사’(1943)로 유명한 평양 출신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의 수기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1952)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돼 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끝난 며칠 뒤, 김일성과 그 가족을 위한 환영회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주최로 평양의 전 일본요정 ‘가센(歌扇)’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 백석도 초대받아 갔다. 김일성은 칠십 전후로 보이는 조모와 함께 비서 문일을 대동한 채 상석(上席)에 앉았고 주최자인 고당 조만식(1883∼1950) 위원장은 상석 우측에 앉았다.
“문학계의 대표로 소개된 소설가 최명익과 시인 백석 그리고 영화계를 대표하여서 필자(오영진) 자신이 있었다. 공산당에서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시(市)의 기성층을 총망라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일대성황이었다. 칠팔십 명의 내객이 넓은 다다미방에 비걱이 들어찼다.”(‘소군정하의 북한’ 96쪽)
위원회의 송호경 비서가 내객을 일일이 소개하고 난 후 천편일률적인 축사와 환영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지리하고 앵무새 독백 같은 찬양사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최명익과 오영진, 그리고 백석은 따로 소집단을 형성하고 술만 축내고 있던 중 문화계의 축사 차례가 돌아왔다. “최명익은 ‘김일성 장군은 제발 일당일파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조시대의 혁명아 홍경래처럼 전민족의 각층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의미의 열렬한 테이불 스피취를 하고 시인 백석은 ‘장군 돌아오시다’라는 즉흥시를 낭송하고 나는 ‘비적 김일성을 잡으러 갔던 조선인 출신 일본인 군인의 추억’이라는 약간 까다로운 제목의 즉흥콩트를 거침없이 읽어냈다. 물론 원고는 없이….”(98∼99쪽)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 주둔군의 압력에 의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고 실권도 점차로 공산당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조만식은 환영회를 주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가 기대한 김일성은 북만주를 누비며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백발성성한 노장군이 아니었다. 최명익이나 오영진처럼 백석도 ‘노장군 김일성’에 빗대 즉흥시를 읊었다는 것이다.
당시 백석은 조만식의 통역비서 겸 외사과장을 맡아보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소련 주둔군과의 통역은 불요불급한 소통 수단이었기에 조만식은 오산학교 시절의 제자 백석을 통역으로 발탁했다. “외사과장 백석은 본업인 시를 집어치우고 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최아립이라는 중노인(中老人)은 군사령부 직속 통역관으로 전출했으므로 노어를 해독하는 유일한 존재인 백석은 몸이 열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83쪽)
소련군정청은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조만식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이를 거부하고 1945년 11월 3일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신탁통치 문제로 소군정과 대립하던 조만식이 1946년 1월 5일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면서 백석은 비서 역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그는 1945년 12월, 당시 20세이던 이윤희와 평양에서 재혼한다.
학계에서는 그가 새로 가정을 꾸리고 번역에 매진하면서 시창작의 동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기도 한다. 1947년 12월 발간된 ‘조선문학’ 2집에 실린 ‘북조선 문예총 명단’에 백석은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방랑과 무책임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깊은 회오 속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시 창작을 멀리 했을 수도 있다. 10년 동안 번역가로 살아가던 백석은 이후 아동문학 영역에서 활동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살던 그는 1959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 배치된다. ‘붉은 편지 사건’이란 당성(黨性)이 약한 인민들을 지방 생산현장에 내려 보낸 운동이다.
“나는 이때 나도 모르게 소를 내버리고 방목지로 달려갔다. 그러자 매애애- 소리치며 놀라 달아나는 새끼 양들을 붙들어 안아 보고, 그 볼에 내 볼을 가져다 비비고 등을 쓰다듬고… 이렇듯 감격에 감겼던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내가 탯줄을 끊은 것들이며, 그것들은 바로 내가 구정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것을 안고 따스한 난롯가를 찾아 갔던 것들이다. (중략) 당의 붉은 편지를 받들어 로동 속으로 들어온 이러한 관평의 양들과 관련을 가진 것은 나의 분외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양들 속에서 나의 로동은 시작되었다.”(문학신문 1959년 5월 14일 ‘관평의 양’)
백석은 이후 한두 차례 평양을 찾지만 1996년 숨을 거두기까지 말년의 대부분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보냈다. 백석의 말년이 불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영남대 국문과 김문주 교수는 “백석은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벽을 헐도록 독려하는 하방운동(下放運動)의 일환으로 관평에 갔을 것”이라며 “정치 숙청의 결과로 확대해석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