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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암살사건과 강경애人間/강경애 2016. 4. 18. 16:47
김좌진 암살사건과 소설과 강경애
최학송
지난 2005년 초, 강경애(姜敬愛, 1906~1943)가 문화관광부에 의해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한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3월 문화인물 소설가 강경애는 김좌진 장군 암살교사범의 동거녀」라는 기사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기사는 이강훈(李康勳, 1903~2003) 전 광복회 회장의 생전 증언을 빌어, 강경애가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 1889~1930)의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金奉煥)의 동거녀였고, 그와 함께 암살을 공모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월간조선>의 기사가 암살사건과의 관련을 제시하는 데 머물렀다면, <순국> 2005년 3월호에 실린 이선우의 「표리부동한 강경애를 논한다-되살아나는 75년 전 악몽」은 김봉환과 강경애가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에 투고한 글이 “적색의 경향”을 띠었다고 하얼빈 일본 영사관에서 트집을 잡은 적도 있다는 등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문화인물 선정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런 주장에 맞서 강경애를 지키려는 노력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2005년 1월 18일 <오마이뉴스>는 「<조선> 지국장 지낸 작가가 김좌진 암살공모?」라는 기사를 통하여, 강경애가 암살 사주범의 동거녀임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실었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문화산맥(www.koreancc.com)’도 열린마당이란 코너에 속속 반박문을 올림으로써 강경애의 결백을 주장했다. 리함과 반벽거사 두 사람에 의하여 주도된 문화산맥의 반박은 주로 다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당시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직접 참가하였던 양환준(梁煥俊)의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을 암살한 것은 공도진(公道珍)이다. 이강훈의 증언처럼 박상실(朴尙實)이 김봉환의 사주를 받고 행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관련자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강경애의 수필을 검토하여 그의 첫 간도행이 1931년 6월에 이루어졌음을 밝힘으로써 김좌진 암살사건에 대한 강경애의 부재증명을 제출한 것이다.
논쟁의 전반 과정을 돌이켜 보건대 관련설을 제기한 일방은 이강훈의 생전증언에 주요 근거를 두었으며 반론을 펼친 일방은 사건에 대한 부재증명을 통하여 이를 부정하고 있다.
부재증명의 진실
“이제껏 알려진 강경애의 이력에는 ‘빈칸’이 많다. 특히 1924년 9월, 양주동(梁柱東)과 헤어지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간도로 갔던 1926년부터 장하일(張河一)과 결혼한 1931년까지의 시기는 정확한 사료가 없다.”<월간조선> 2005년 2월호
“그 결과 중국 간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그곳에서 김봉환과 만나 해림에서 살림을 꾸리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백야 장군 암살에 관여하는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순국> 2005년 3월호
위와 같이 관련설을 제기한 글들은 대부분, 1920년대 중후반 강경애의 간도 거주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첫 간도행 시점이 1931년임에 기초를 둔 부재증명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논쟁 쌍방이 모두 간도와 만주를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첫 간도행 시점을 첫 만주행 시점으로 보고 있다. 간도와 만주는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인 듯하다. 그러나 강경애도 간도와 만주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는가?
그는 수필 「두만강 예찬」에서 “지금의 간도라면 왕청, 연길, 화룡, 훈춘 이 4현을 말함이니 이 넓은 지광(地廣)에 조선인이 사십만이다”라고 했다. 이는 강경애가 생각하는 간도가 만주의 일부분인 두만강 상류 북간도에만 한정됨을 가리킨다. 부재증명에 사용된 수필에 나오는 구체적인 이주지가 모두‘간도’나‘용정’임을 볼 때 1931년 첫 간도행 사실은 결코 그 이전에 간도 외의 만주의 다른 지역에 간 적이 없음을 보장하지 못하며 나아가 김좌진 암살사건에 대한 부재를 증명하지도 못한다.
이강훈의 생전 증언은 간도가 아닌 북만에 있는 도시 하이린(海林)겢類?寧安) 일대에서의 강경애를 말하고 있다. 문제는 강경애가 정말 북만에 간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북만신민부』(필사본, 1945)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한민족독립운동사(4)』에 의하면, 1926년 4월 강경애는 김봉환과 함께 <신민보>에‘적색의 경향’을 띤 글을 발표하며 <신민보>는 이 때문에 활동이 중지된다(이강훈의 증언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신민부의 선전부장이었던 허성묵(許聖默, 본명 斌)의 조카 손자인 연세대 교수 허경진이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강경애와 허성묵은 같은 고장 선후배 사이였다. <신민보> 주간을 담임하고 있던 허성묵은 강경애가 <신민보>에 쓴 글 때문에 한동안 숨어 다니다 부하의 밀고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927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의 「하얼빈 일본경찰관 신민부원 다수검거(哈爾賓日本警察官新民府員多數檢擧)」란 보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북만 하이린겢類?일대에서의 생활 흔적은 작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강경애가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이 「파금(破琴)」(<조선일보> 1931년 1월 27일~2월 3일)임은 모두가 익히 아는 바이다. 이념적 갈등으로 번민하던 형철이가 가정의 파산을 계기로 만주에 이주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파금」은 형철이의 구체적인 이주지를‘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설정한다.‘영고탑’의 소재지는 북만 닝안이다. 닝안의 바로 옆 도시가 하이린임을 염두에 둘 때 1920년대 중후반 강경애가 베이징(北京)에서 나온 김봉환과 함께 하이린에 거주하였다는 이강훈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 닝안에 신민부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라는 두 개의 항일조직이 있었음을 상기할 때, 형철의 이주지로‘만주 영고탑’이 선택된 것은 이곳 항일조직들에 대한 동경의 표현일 뿐 작가적 체험과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김봉환과 함께 하이린에 거주하였다는 강경애가 우리가 말하는 소설가 강경애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는가?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정화암(鄭華岩, 1896~1967)의 증언에 의하면 그럴 가능성은 적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명예교수가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면담해 정리한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이란 책에 의하면, 김봉환은 1927년 북만으로 이주했고 이미 만주 닝안현의 어느 마을에서 유치원 여교사와 결혼한 상태였다. ‘닝안현의 어느 마을’이라는 지명과‘유치원 여교사’라는 직업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곳은 「파금」의 주인공 형철이의 만주행 목적지‘만주 영고탑’소재지와 같은 곳이며 ‘유치원 여교사’는 김헌순 등‘1929년 간도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강경애가 간도에서 종사했다는‘교육기관의 임시교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강훈과 허경진의 증언을 더하면 김봉환의 결혼상대자인‘유치원 여교사’는 우리가 말하는 소설가 강경애이며 그는 1920년대 중후반에 북만의 하이린겢類?일대에서 생활한 것이 확실하다. 김헌순이 말한‘1929년 간도행’은‘1926년 북만행’의 착오가 아닐까?
이강훈과 정화암의 증언이 모두 오랜 기억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자료들을 참고해보면 논란이 많던 1924년 9월부터 1931년 6월 사이 강경애의 행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924년 9월 양주동과 헤어진 강경애는 동덕여학교를 중퇴하고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와 문학공부를 하며 지내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1926년 북만 닝안 일대로 이주한다. 그곳에서‘유치원 여교사’를 지냈으며 사회주의자 김봉환을 만나 함께 살았다. <신민보>에‘적색 경향’을 띤 글을 발표하며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1928년에 황해도 장연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근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경향이 강한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장하일을 만나 결혼하고 1931년 6월 다시 만주로 가게되는데 이번 행선지는 간도 룽징(龍井)이었다.
강경애와 그의 문학을 보는 시각
1920년대 중후반에 강경애가 북만 하이린겢類?일대에서 생활한 적이 있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암살 관련 논쟁 과정에서 쌍방은 모두 간도와 만주를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첫 간도행을 첫 만주행으로 보았다. 그 결과 첫 간도행 시점에 의거한 부재증명이 제출되었으며 이는 암살 공모자라는 비난과 의혹으로부터 강경애를 보호하는 병풍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이 병풍을 걷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좌진 암살사건의 원인과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확정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이강훈은 변절한 김봉환이 박상실을 사주하여 김좌진을 암살했다고 증언한 반면, 정화암은 공산당의 조직적 행위로 보고 있다. 또 앞서 말한 것처럼 양환준은 김좌진 암살이 공산당의 조직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암살범도 박상실이 아닌 공도진이란 사람이라 한다.
이처럼 사건 자체가 아직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시점에서 강경애를 김좌진 암살 공모자로 규정하는 일은 아직 섣부르다. 이 사건으로부터 강경애를 보호하려는 주장들은 그간 부실한 알리바이 증명에 지나치게 기대어 왔다. 또 강경애를 암살 공모자로 몰아 부정하려는 주장들은 몇몇 증언을 근거로 이념적 속단과 편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두 주장들은 진실의 규명만이 작가 연구의 기본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강경애가 김좌진 암살 공모자라고 해서 그의 문학이 단순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의 문학이 높은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한 작가의 생애 혹은 그가 남긴 문학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참모습을 밝힌 뒤에 할 일이다. 이를 계기로 강경애 연구의 새 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
#저자 약력
崔鶴松 1979년 중국 길림성 출생. 인하대 한국학 대학원 박사과정. 논문으로 「만주체험과 강경애 문학」이 있다.
부록: 강경애는 김좌진 암살교사범의 동거녀 ?
한국문화관광부(이하 문화부)는 ‘2005년 이달의 문화인물’로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申東曄·1930~1969), 소설가 강경애(姜敬愛·1906~1944) 등 12명을 선정했다.
지난 1월4일 오후,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기자를 찾아왔다. A씨는 “문화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강경애씨가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1889~1930) 장군의 암살 교사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부 장관에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강경애에 대한 문화인물 지정 철회 민원을 제기했다”면서 문화부의 답신 두 장을 보여줬다.
문화부는 A씨의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각 시도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전문가 13인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넘겨서 선발을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관의 ‘친일행적’ 조사 등 인물 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라면서 “소정의 절차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선정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부는 “귀하께서 제기하신 강경애씨가 ‘김좌진 장군 암살 교사 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문화인물로 선정됐다”고 했다.
문화부의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취지에 대해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을 再조명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항일 무장투쟁의 지휘관인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는 데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강경애씨가 과연 청소년의 귀감이 될 인물이냐”는 것이 A씨의 주장이다.
그는 “용정(龍井)의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라며 한탄했다.
이강훈(李康勳)옹의 증언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 암살 교사 음모에 간여했다고 주장하는 문건들로서는 ‘독립운동대사전’(광복회) ‘한민족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이강훈 자서전-민족해방운동과 나’(제3기획) ‘이강훈 역사증언록’(인물연구소) ‘일제하36년-독립운동실록’(동도문화사) ‘흑룡강성 해림시(黑龍江省 海林市) 김좌진 학술 토론회 자료-박기봉(朴奇峰)’(조선족민족사학회) 등이 있다.
‘일제하 36年-독립운동실록’은 작가 이이녕(李二寧)씨가 김좌진 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한 이강훈, 정환일(鄭煥日), 임기송(林基松)씨 등을 인터뷰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다. 이씨는 강경애와 깁봉환(金奉煥·일명 김일성) 두 사람이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松島)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朴尙實)을 사주해 1930년 1월24일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강경애가 김봉환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을 암살 교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광복회 회장을 지낸 청뢰 이강훈(靑雷 李康勳·1903~2003) 선생이다. 이 선생은 강원도 금화 출생으로 만주에서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26년에는 김좌진 장군의 지시로 백두산 근방에서 신창학교(新彰學校)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입하여 동북만(東北滿)에서 활약했으며, 1933년 3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15년형을 받았다.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그는 김좌진 장군 사회장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김봉환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이제껏 알려진 강경애의 이력은 ‘빈칸’이 많다. 특히 1924년 9월, 양주동(梁柱東)과 헤어지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간도로 갔던 1926년부터 장하일(張河一)과 결혼한 1931년까지의 시기는 정확한 사료가 없다.
1931년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혜성’지(誌)에 ‘어머니와 딸’을 연재하는데, 이것이 강경애의 실질적인 등단작이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1931년부터 1938년까지 8년간 간도에서 씌어졌다.
이강훈 옹이 진술한 것은 강경애가 장하일과 결혼하기 이태 전인 1929년의 일이다. 이 옹은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 ‘강경애가 김봉환과 함께 김좌진 암살 교사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1927년 봄, 김봉환은 해림역(海林驛)에 도착해 그의 애인 강경애라는 여류 문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밀양 출신 김봉환이라는 자는 일찍이 동래 범어사(梵漁寺)의 승려였다. 그는 3·1 운동 당시 범어사 ‘학림 의거’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1년6개월형을 받고, 같이 승려생활을 하던 김성숙(金星淑)과 북경으로 오게 된다. 김성숙은 나중에는 임정(臨政)에 참가해 국무위원까지 지내다가 8·15 광복 후에 귀국하여 혁신정당의 최고 고문까지 지냈다.
북경에 온 김봉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여 활동을 하다가, 김좌진 장군이 영도하는 독립운동 기관에 대한 공작책임을 지고 북만(北滿)으로 와서, 당시 독립운동가가 출입하는 요충지인 해림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김봉환은 여류문인 강경애와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김봉환·강경애는 재만(在滿) 3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신민부(新民府)의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투고하면서 수많은 민족진영 간부들과 접촉했고, 평도 나쁘지 않았다.
1926년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에 처음으로 참여한 김봉환은 1927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선전활동에 나선다. 김봉환·강경애가 신민보에 투고하는 글이 적색(赤色)경향을 띠자, 일제 하얼빈 영사관은 이것을 트집 잡아 이들을 체포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일본경찰 마쓰시마의 미인계 책략
어느 날 김봉환이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 하얼빈영사관의 마쓰시마(松島) 경부 등에게 체포되었다. 마쓰시마 형사는 한국말에 능통한 독립운동가 취조 전담이었다. 영사관원들은 김봉환이 혁명가 행세를 하기는 하나 첩까지 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것을 약점으로 파악했다. 당시 영사관은 외교공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찰조직과 유치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얼빈영사관의 마쓰시마 경부는 주일(駐日) 조선총독부가 이광수(李光洙)의 애인 허영숙(許英淑)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있는 이광수를 꾀여 입국시켜 전향시켰던 미인계 책략을 구사했다.
마쓰시마는 역시 수배 중이던 강경애를 꾀어내어 하얼빈영사관 유치장 면회실에서 두 사람을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애가 마쓰시마의 변절 요구를 수용했고, 그 결과로 김봉환과 강경애는 석방됐다. 당시 일제의 형법대로 하자면, 몇 년의 옥고를 치러야 할 두 사람이 석방된 것이다. 지식인이었던 김봉환은 양심적으로 고민이 됐다.
1993년 흑룡강성 해림市에서 조선민족사학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김좌진 피살설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박기봉(朴奇峰)씨는 “김일성(金一星·김봉환)이 일제 령사관에서 제기한 교환조건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체형도 받지 않고 쉽사리 석방될 리는 만무한 것이다. 김일성은 아성·해림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할빈(하얼빈)령사관에 귀순한 변절자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이강훈 선생의 증언이다.
<김봉환은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마침 일본 경찰도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김좌진이요,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에서도 최대의 기피인물인 김좌진을 없애는 것이 일제 무리에 보은도 되고 자기 동료들에 대해 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애인과의 달콤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는 김좌진 장군을 생포하길 원했고, 당시 공산계 독립운동가 계열은 그를 없애길 원했다. 고민한 끝에 김봉환은 자신이 믿는 공산청년회 당원 박상실(朴尙實)에게 총을 전달하며 암살을 부탁했다.
김좌진 장군이 사는 중국 흑룡강성 산시(山市·러시아말로 빨니강) 정거장 부근 개천에는 족제비가 우글거려 겨울이면 족제비 사냥꾼이 득실거렸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박상실(朴尙實)은 산시에 머물면서 족제비 사냥꾼으로 눌러 있으면서, 김 장군을 경호하는 청년들도 사귀어 경계심을 풀게 했다.
1930년 1월24일 오후 3시, 박상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김 장군을 모시고 있던 청년들이 고강산(高崗山) 경호대장과 함께 철둑 너머 술집으로 모두 쏠려간 것이다. 박상실 혼자만 김좌진 장군과 남게 됐고,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인적이 한산했다. 김좌진 장군은 ‘한족총연합회’에서 경영하는 정미소를 둘러보기 위해 그곳으로 가려할 때, 박상실이 그 뒤를 밟았다.
독립운동가들, 곧바로 김봉환 총살
김 장군의 자택에서 3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까지 따라간 그는 김 장군이 정미 기계를 둘러보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순간, “빵! 빵!” 총을 두 발이나 발사했다. 비보가 전해지자 내외 각지에서는 조문이 속속 이어졌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 선생은 장춘(長春)지국장을 통해 거액의 부의금과 정중하고 애처로운 만장(輓章)을 보내왔다. 사회장으로 봉장(奉葬)할 새 북만 거류동포로 人山人海를 이루었고, 중국인도 많이 참가하여 “커우리 왕즈 쓸라(조선의 왕이 죽었다”를 외치면서 슬퍼했다.
흉한(凶漢)이 일을 저지른 시간은 오후 5시경으로, 중국 군경(軍警)과 우리 청년대원들이 총소리를 듣고 흉한을 추격하니, 벌써 황혼이라 놓치고 말았으며, 배후 지시자 김봉환을 곧 체포하여 독립운동 기관의 결의로 총살하였다>
박기봉씨의 논문, ‘김좌진의 피살설에 대한 연구’를 보면, 만주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적기(赤旗)’지(誌) 1930년 3월호에 김봉환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당시 북만에 있는 공산주의 단체에서는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근간으로 결성된 김좌진 장군의 ‘한족총연합회’를 싫어하였고, 최고 책임자인 김좌진을 몹시 혐오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김좌진 암살에 공을 세운 김봉환의 죽음을 추도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폭로되지 않은 김봉환의 변절행위에 대해선 전혀 주목을 돌리지 못했다.
김좌진 장군 암살 사주자는 김봉환이었고, 하수자는 박상실이었으며, 막후조종자는 일제 할빈영사관 경찰이었다. 김봉환은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결정에 의해 동북 3성에서 해산된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이었으며, 일제 할빈영사관에 변절한 친일 주구배(走狗輩)였다>
문화부 내부 문건인 ‘2005년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과정’을 살펴보면, 한국학·문학·문화·어문·미술 등 분야에서 17명을 선정했다. 친일 행적과 관련된 검증은 민족문제연구소·국사편찬위원에서, 친북·용공 행적 관련한 검증은 국가정보원에서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초 문학부문에서는 마해송(馬海松)·신동엽(申東曄)·이규보(李奎報) 등이 정 후보로, 강경애가 예비후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마해송이 친일행적으로 빠지는 바람에 예비후보였던 강경애가 최종 선정됐다.
강경애씨를 문화인물로 추천한 사람은 ‘한국여성문학학회’ 회장이며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인 이상경(李相瓊·44)씨다. 李교수는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강경애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강경애 연구 전문가다.
“암살에 가담한 사실을 몰랐다”
지난 1월12일 문화부 정동채(鄭東采) 장관 앞으로 공식질의서를 보냈다. 이 질의에 대한 문화부의 답변이다.
―강경애씨가 김봉환씨와 함께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가담한 사실을 알았나.
“알았다면 더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강경애씨의 문화인물 선정은 선정기준에 따라 외부전문가 13명으로 구성된 선정자문위의 심사를 통해 결정된 것이다. 작년 9월17일 선정자문위가 열렸을 때, 추천 인물들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친일 행적 인사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강경애씨에 대한 과거 행적 문제를 제기한 위원은 없었다.”
―문화인물 선정 후보자에 대한 친일 여부 검증 단계에서 왜 이 문제를 밝히지 못했나
“선정자문위에서 제출된 자료와 외부의 검토자료를 바탕으로 인물을 검증했으나 강경애씨에 대한 ‘친일 행적’ 또는 ‘김좌진 장군 암살’과 관련된 객관적 검증자료가 없어 반영하지 않았다.”
―강씨는 마르크시즘을 수용하고 프로문학 계열의 소설을 많이 집필한 작가다. 혹 강씨의 선정에 대해 최근 죄익운동가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받은 것은 아닌가.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선정한 것은 아니다. 강씨는 대전시가 추천한 것이다.”
―문화인물 선정 후보자의 친일 여부 검증을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좀더 공정성을 기하려면 시민단체보다는 전문성 있는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나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 일임하는 것이 균형 있고 공신력 있는 것 아닌가.
“선정당시 후보자 검증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기념관’에도 인물에 대한 자료검토를 의뢰했으나, 독립기념관에서는 강씨에 대한 별도의 자료를 찾지 못했다』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배후로 논란이 일고 있는 마당에, 향후 문화부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예정인가.
“강씨에 대한 ‘친일 행적 또는 김좌진 장군 암살 배후’ 등의 구체적 입증자료가 제출돼, 강씨에 대한 문화인물 선정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언론에 별도의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
용정(龍井)에서 강경애에 대한 평가
1999년 8월8일, 중국 연변의 용정시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그 비석 뒷면에는 간단한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용정 3·13기념사업연구회’ 김근화(金根化·78) 고문은 “용정에서 강경애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면서 “그런 그녀가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간여했다면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했다.
용정을 찾는 관광객들은 비암산 일송정(一松亭)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를 보게 된다. 문학평론가들은 “강경애는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강경애가 여성작가라는 점과 하층민들의 삶을 소설화했음에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신용하(愼鏞廈·67) 명예교수는 “강경애가 일제의 사주를 받아 김좌진 장군 암살에 개입했다는 것은 정확한 사료를 가지고 충분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면서 “김좌진 장군은 일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간도지방에 지부를 두고 있는 적기단(赤旗團)이 감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박상실(朴尙實)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는 ‘논란이 있는 인물을 문화인물로 선정하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면서, “그녀가 남편(동거남 김봉환)을 구하기 위해 위장전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강경애를 반(反)민족적 인사로 단정하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고 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성신여대 이현희(李炫熙·67) 명예교수는 “소설가 강경애씨가 민족지도자인 김좌진 장군을 죽인 사람이라는 말을 이강훈 선생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면서 “광복군 출신인 고(故) 박영준(朴英俊) 한전 사장도 ‘임정 인사들은 강경애가 김 장군 암살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는 “문화관광부가 역사적 사료나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 강경애를 문화인물로 선정했다면, 이제라도 선정 자체를 보류하고 진실규명을 한 연후에 문화인물로 지정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문화부는 ‘강경애가 이달의 문화인물에서 취소 내지 보류하기 위해서는 강씨에 대한 구체적 친일 입증자료가 제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1927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활약한 김좌진 장군을 2005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좌진 장군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문화부는 김 장군 암살 사주범의 동거녀를 ‘3월의 문화인물’로 기리는 일이 벌어졌다. 시행착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사실의 충돌이 정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월간조선 오동룡 기자
2005.01.17
가져온 곳 http://cafe.daum.net/wpd99/Rky3/17?q=%BE%E7%C1%D6%B5%BF%B0%FA%20%B0%AD%B0%E6%BE%D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