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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북촌의 역사 인물 (차웅렬)
    社會/서울, 경성, 한양 2018. 3. 28. 19:35

    서울 北村의 역사 인물 
                                              
                                                               차웅렬(서지학자) 



       서울 지하철 안국역 3호선 2번 출구를 나오면 재동 입구에 이른다. 그 길을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 헌법재판소, 오른쪽에 재동초등학교에 이른다. 이곳이 가회동 입구다. 한국을 대표하고 서울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전통을 자랑하는 곳으로, 잡지 언론계의 선구자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교육, 의학, 금융계의 거물들과 천도교인들의 다수가 모여 살던 북촌…. 오늘날에도 이러한 유명한 인물들이 모여 사는 곳은 찾아 보기 어렵다.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 재동, 계동, 원서동, 화동, 안국동, 사간동, 소격동, 팔판동, 삼청동 일대는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북촌 마을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최고 명당은 창덕궁 일대를 꼽았다. 북촌은 햇볕 잘 들고 하수 관리가 잘 되어 살기 좋은 곳이다.
       여기서 북촌과 남촌에 대한 설명을 해 둬야겠다. 일본이 보호조약으로 한국을 합병한 다음 남산 중턱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남산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일본 사람의 거류지로 만들고 헌병사령부를 짓고 백화점으로 미쓰고시, 정자옥, 미나가이, 히라다 등이 개업하여 일본인의 거류지를 번창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충무로 거리는 길 폭이 좁았으므로 자동차와 마차를 못 다니게 하고 보행자는 좌우편으로 마음대로 다니면서 물건을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거리를 ‘본정통(本町通)’이라고 불러 서울의 번화한 거리로 만들었다, 본정통 다음으로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정(黃金町)’이라 해서 일정목부터 육정목까지 있었는데 동대문 운동장은 황금정 육정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청계천은 넓은 개천이었는데 최근 다시 복원하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청계천은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아래 모교(毛橋)로부터 시작되어 종로 네거리의 광교, 더 내려와서 장교, 그리고 삼일빌딩 아래에 있는 수표교, 그 아래가 종로3가의 관수교, 화리껴다리, 효경다리, 배다리, 마전다리, 첫다리 등을 거쳐 끝으로 오간수다리로 해서 왕십리로 이어진다. 이 청계천이 서울의 남북을 갈라 놓은 구획선 노릇을 하였다. 청계천 북쪽이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이른바 북촌이 되고, 그 남쪽이 일본 사람이 많이 사는 남촌이 된 것이다. 북촌의 중심은 종로이며 남촌의 중심은 본정인데 해방 전까지도 남촌과 북촌 차이는 확연하였다. 
       남촌에 들어서면 거리가 번화하고 활기가 차 있었지만, 북촌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모든 것이 잠자는 듯하였다. 북촌은 종로에 YMCA(기독교청년회관)와 천도교당이 덩그렇게 서 있을 뿐 나머지는 푸른 기와 지붕과 누런 초가 지붕뿐이었는데 남촌은 커다란 양옥집들이 수없이 우뚝 서 있어서 신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

       1930년대만 해도 종로에는 큰 상점이라고는 박흥식이 경영하는 화신상회뿐 그 아래는 금은방들이 늘어섰고 화신상회 이외에 인사동 모퉁이에 있는 동아부인상회가 제일 큰 백화점 구실을 하였다. 그 밖에 대창양화점, 한경선 양화점과 같은 큰 구두방과 김윤면 포목점, 구정상회 같은 큰 포목점이 종로 상가를 꾸미고 있었다. 이렇게 북촌에는 가게도 많지 않고 값도 비싸서 젊은 멋쟁이나 부유한 가정의 부인들은 물건을 사러 남촌으로 나갔다. 전차를 타고 왕복해도 전차 값이 빠지고 물건이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인 정자옥, 미쓰고시, 미나가이에는 넓고 실내장식이 잘 되어 있는 식당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싸게 먹을 수 있었으므로 매우 번창했는데 손님의 대다수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가회동의 동명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가회방에서 유래되었으며 1914년 북부 맹현과 재동, 동곡, 계동 일부를 묶어 가회동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의 자연부락인 홍현(紅峴)은 지금의 정독도서관의 남쪽에 있던 고개로 붉은 흙이 많아서 붉은재라 하였으며 동곡(東谷)은 가회동, 재동, 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붉은재의 동쪽이 되므로 동골이란 한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또한 맹현(孟峴)은 홍현의 북쪽에 있는 고개로 세종 때 유명하던 고불 맹사성의 후손이며 숙종 때 황해, 충청 감사를 지낸 맹만택이 살았으므로 ‘맹 감사 고개’ 또는 ‘맹동산’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가회동 1번지 북쪽 모퉁이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취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의 지형이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이어서 산줄기인 재동에 힘이 센 장사가 많이 나므로 재동 8장사라 하였으나 정자를 지은 후에는 장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대는 울창한 숲과 맑은 물, 청풍과 함께 문인 지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이 취운정 아래 안국동, 재동 등에 거주하며 서로 왕래하면서 모의하였고 또 취운정을 찾아 국내외 정세를 가늠하고 국가의 장래를 설계하였다. 가회동 막바지 취운정과 연결된 곳에는 경기감사 심상훈의 백록동 정자가 있었는데 송림이 울창하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였다.

       취운정 부근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가 멀리 대구서 올라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그 아랫집에는 1921년 경성의학전문 외과주임이며, 1936년 백병원을 개원하였으며 오늘의 인제병원을 설립한 외과의 제1인자 백인제 박사가 살았다. 
       그 아랫집이 현상윤 집이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경서를 수득하고 1912년 보성중학을 나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마치고, 3·1운동 계획의 주동인물이 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이후 해방 때까지 중앙고보 교장을 역임하고, 1946년 초대 고려대학 총장을 지냈다. 일생을 교육사법에 공헌한 교육계의 원훈이다. 
       그 밑이 조선일보 편집국장인 함상훈의 집이며 그 아래 아래가 개성의 갑부이며 일제 때 금강제약회사를 이끈 전용순의 집인데 우거진 숲과 유명한 약수터를 흡수하여 웅장한 성벽 속에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윤치창은 쑥돌로 지은 양옥집에 살았는데 좀 특이한 집이었다. 건너편에는 해방 후 조선통신사장을 지낸 김승식이 살았는데 빨간 벽돌 양옥집에서 모녀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오가는 행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후 종로구청장을 지낸 김진용이 조촐안 한옥집에 기거하였다. 그는 영암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청소년들의 선도에 많은 힘을 썼다. 서울대 농대와 일본 경도대학을 나와 고려대 교수를 지냈으며, 육림학의 권위자인 김장수가 장남이며, 유골을 나무 밑에 묻은 화제의 인물이다. 셋째 아들은 서울문리대 정치학과를 거쳐 서울외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김계수이며 필자와는 재동소학교 동기동창인데 일찍 세상을 떴다. 

       바로 앞집이 보진재라는 유명한 인쇄소를 이끌며 『개벽』 잡지 발행에 숨은 공을 내운 김기모의 부친 집이다. 오늘날 현대문학을 탄생시킨 집안이다. (이 분 큰아들이 前서울대병원장 故김홍기박사이고, 보진재는 김원장의 차남이 이어받아 잘 하고 있습니다.)

       친일 거물인 한상억은 일본 정부가 주는 ‘공작’이라는 대우를 받고 기고만장하게 군림했으며 조그마한 키에 여덟 팔자 걸음으로 거만하게 활개치며 다녔다. 그의 집은 아주 귀한 쑥돌로 담장을 쌓고 정원수가 울창한 큰 한옥집인데 해방 후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사회주의 작가였던 남편 안막과 살았다. 국제성을 지닌 독특한 현대무용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던 최승희는 192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주로 경성과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미국과 유럽 중남미에 걸쳐 눈부시게 활동하였고 남편이 북에서 숙청당한 후 오랫동안 연금상태에 있다가 뒤따라 숙청당한 후 4~5년 전에 뒤늦게 명예가 회복되어 이북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집 앞에 유억겸이 살았는데 작은 키에 봉투를 옆에 끼고 단장을 짚고 다녔다. 온화하고 귀공자 모습을 지니고 연희전문(연세대) 부총장과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 부장으로 교육 발전과 진흥에 전력을 경주했다. 생전에 필자의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상 와서 긴 한숨을 쉬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탄식을 하셨다. 그의 부친 유길준은 조선시대 말기의 정치가, 개화운동가로, 외국에서 귀국할 때 위험한 인물로 보고 우포청(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가두었는데 당시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주선으로 포도청 대신 백록동(가회동 막바지 삼청동 쪽 일대)에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유명한 『서유견문』이란 책을 저술했다.

       계연집은 평북 선천에서 올라와 천도교 경성종리원장, 천도교 중앙총부 경리관장, 서울교구장 등을 거치면서 온갖 정성을 교회에 바쳤다. 늘 홍안의 미소로 온화한 인품과 조리 있는 말씀은 남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가 경리관장일 때 어린 필자가 광목 자루에 성미를 어깨에 매고 가면 상냥하고 인자한 눈빛으로 맞아주신 인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필자가 약혼식할 때 함을 갖고 부모님 대행으로 가 주신 잊지 못할 어른이며, 아버님과도 보성중학 선후배로 돈독한 사이였다. 아들 계훈모는 서울대학 도서관 근무 시절 14년에 걸친 『한국언론연표』 세 권을 펴냈으며 교회에도 희귀한 책과 자료를 많이 기증했다. 

       계연집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이구영이 살았는데 갑산교구장과 천도교 중앙총부의 여러 부처에서물심양면으로 이바지하셨다. 부인되시는 ‘양순’ 아주머니는 내성단 여성회원 중에도 미인이었다. 아주머니는 늘 어려운 일을 도맡아 많은 활동을 하셨다. 

       한편 이군오는 상주선도사로 교리 강의에 뛰어나고 차분한 성격에 열성적으로 교회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다. 자제인 이윤칠은 토목 건축에 조예가 깊으며, 정광조의 장남인 정성호와 같이 청년회, 소년회에서 활약했다. 필자의 선친이 작고하셨을 때 장의 절차와 장례식에 협조해 주신 분이다. 이 왕가의 한 분인 이달용도 깔끔한 복장과 조용하고 살금살금 걸음걸이로 동네를 오가곤 했는데 일본 헌병 경찰관들의 경호가 심했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 의한 이왕 일가의 대우는 일본 귀족령에 의하여 상당한 예우와 혜택을 받았다. 

       가회동 천주교당 아래 골목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도교인 중에서 유일하게 양옥집을 지니고 사시던 오봉빈(보성중학 4회) 댁이 나온다. 골동품 수집, 감식 등의 권위자며 또한 봉황각 건축에도 관여했다. 그 자제인 吳道光은 체육계의 일화, 격조 높은 논설로 언론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바로 아랫집에 풍운의 정객인 조병옥이 살았다.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 목천에서 태어나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안창호의 인격과 행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흥사단에 가입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신간회에 가입하여 광주학생사건 때 3년 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거쳤으며 일제 말년에는 무직으로 가난에 시달렸다. 출출하고 술 생각이 나면 “청오 선생!” 하면서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어려운 식량난에도 어머님께서 장만해 놓은 약주를 드시면서 시국 돌아가는 양상과 망명한 동지들의 희미한 소식들을 전하면서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두주불사로 주호였다. 집 앞의 작은 축대에 쭈그리고 앉아 오가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아롱거린다. 해방 후 우익 세력 단체인 한국 민주당 창당에 힘썼으며 미군정 하에서 좌익 투쟁과 치안 확보 등 경무부장으로 6·25 전쟁 때 ‘대구 사수’ 명령은 너무도 유명하다. 장인 친구인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아 갈라섰으며 야당 영도자로 자기 신념을 관철시켰다. 한편으로는 풍류호걸로 열혈 투사로 비난도 많이 받았고, 물의도 많이 일으켰지만 누구 못지 않은 많은 업적도 남겼다. 천도교의 중진이며 여러 중요직을 두루 거친 의암성사의 둘째 사위인 정광조는 최린과 함께 풍신, 언동이 가장 뛰어났으며 단정한 옷맵시는 모든 교인들의 숭상의 대상이었다. 지금 둘째 자제인 정세호의 부인(서울교구)이 시일마다 참석하고 있다. 작년에 캐나다에서 살다 유골로 돌아온 김죽희는 큰 자제인 정성호의 부인이다. 

       길 건너에 여운형이 기거했는데 아주 빈약한 2층 목조건물이라 동네에서 ‘까치집’이라고 불렀다. 도량이 넓으며 조선 체육회장으로 임원과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조선의 건아들!” 하며 외치는 소리는 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훤칠한 키에 순수한 얼굴과 특히 청소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온 국민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대전형무소를 나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이른바 ‘일장기’ 사건으로 물러난 다음 극비리에 <조선건국연맹>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해방 후 최초로 건립된 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되었다. 근로인민당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을 구성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우합작도 성사되지 않는 극단 대립 속에 1947년 7월 19일 한지근의 총탄에 혜화동 로타리에서 백주에 쓰러졌다. 두 딸과 아들은 해방되자 김일성의 옹호 아래 일찌감치 북으로 가서 소련의 교육을 받았다. 딸 난구, 연구는 필자의 재동소학교 선배였으며 아들 원구는 후배였다. 오래 전 이북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필자의 선친인 차상찬과는 이웃하여 살고 친분이 두터워 선친께서 1932년 조선중앙일보에 역사소설 「장희빈」을 최초로 연재하는 인연도 맺어졌으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중도에 폐간되는 바람에 연재소설도 반년만에 중단되었다. 나머지 유고는 한국 잡지 정보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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