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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공간 김동인 미발굴 자료1 (김태완기자2012.4.월간조선)
    人間/문학사의풍경 2018. 3. 28. 23:18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독점 공개

    “삼천 만의 작은 인구를 몇 조각으로 나눠야 하나”

    ⊙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씨가 수십 년간 김동인 자료 모아
    ⊙ 광복 이후 박순천·모윤숙이 관여한 《가정신문(家政新聞)》에 주로 발표
    ⊙ 이승만 박사를 비난하는 좌익세력을 ‘반역론자’라고 공격
      좌우익(左右翼)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 김동인(金東仁·1900~1951) 선생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미발굴 자료가 빛을 보게 됐다.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金鍾旭·75)씨가 수십 년간 모은 자료를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김동인 선생의 미발굴 자료는 1960년대 초 평화출판사에서 발행한 전 5권 《김동인 전집》, 1976년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한 전 7권 《김동인 전집》, 1987년 《조선일보》가 펴낸 전 16권 《김동인 전집》에서는 빠진 산문(散文)들이다. 대부분 광복 이후 쓴 것이다.
      
      김종욱씨는 삼중당의 《김동인 전집》 간행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 인연으로 동인에 대한 관심을 이후에도 놓지 않고 국립중앙도서관과 대학도서관, 청계천 고서점을 뒤지며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요즘도 매일 국립중앙도서관을 찾는다.
      
      “삼중당판 전집을 만들 때 평화출판사판을 텍스트로 동인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평화판’은 내용 거의가 오탈자, 미발굴 자료가 많았어요.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김동인’이라는 이름 외에 아호(雅號)로 발표된 작품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동인의 작품인지 확인을 위해 고심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어딤(시어짐)’, ‘춘사(春士)’, ‘금동(琴童)’ 등 김동인의 것으로 밝혀진 아호 내지 필명(筆名) 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던 것이다.
      
      “선생이 직접 경영했던 《야담(野談)》지에는 무수한 필명이 대거 등장하는데 과연 그 글들을 모두 동인 선생의 글로 볼 것인지 여간 고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야담》에 쓴 글 중 어떤 것이 동인의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이가 쓴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존심을 굽히고 닥치는 대로 글을 쓰다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씨.
      이번에 공개하는 글은 삼중당판 전집이나 《조선일보》판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다. 광복 이후 《大東新聞(대동신문)》과 《가정신문(家政新聞)》에 주로 실린, 그러니까 말년의 동인이 쓴 글이다. 《가정신문》은 《대동신문》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은 뒤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제호(題號)를 바꿔 1946년 3월 21일 창간한 신문으로, 김동인은 두 신문에 많은 글을 실었다. 당시 《가정신문》의 편집장이자 주간이 모윤숙(毛允淑) 선생이며 이후 김말봉(金末峰) 선생이 바통을 이어받아 6·25 직전까지 발행됐다고 한다.
      
      그 무렵, 동인은 소설을 쓰기보다 시국(時局)을 한탄하는 시론(時論)과 수필을 주로 썼다. 마음 편히 창작을 할 만한 상황이 못 됐기 때문이다.
      
      당시 선생은 몹시 궁핍했다. 젊은 시절, 막대한 유산을 탕진한 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고 한다. 신문, 잡지 등 매체를 가리지 않았다. 이 무렵 동인에게 글은 예술성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생존은 1946년 4월 3일자 《가정신문》에 실린 <한인(韓人)이기에-5>에 ‘쌀 문제’를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다.
      
      <쌀이 없어 사람들이 굶을 지경이라, 어떤 말을 들어도 ‘부엌에 한 알의 쌀도 없어서 엊저녁도 굶고 조반(朝飯)도 못 지었다’는 급박한 사정이 아니요, ‘빨리 해결책을 세우지 않으면 굶을 호구(糊口)가 많다’는 의식 정도로 인식하는지라.>
      
    김동인 상.
      또 광복 직후 작가 이태준, 김남천, 임화 등이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하며 순수문학 작가들을 배척하려 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이들과 맞섰다. 북한 공산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비난하는 이들을 ‘민족반역자’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또 1945년 8월 17일 임화, 김남천의 주도로 발족한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를 제명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퇴장한 일화(逸話)도 있다. 
      
      <이승만 박사의 말을 기화로 삼아 천백(千百) 가지로 얽어매어 이 박사를 무함(誣陷)해서 ‘이 박사는 북조선을 영 포기(抛棄)하잔다’ 어쩐다 한 반역론자(反逆論者)들은 결국 그들의 본시(本是)의 목적인 ‘이 박사와 한인 대중의 이간(離間)’은 성공치 못하고 이 박사가 명료(明瞭)치 못하게 발언했고 강연의 본지(本旨)를 더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철저(徹底)시킬 기회를 준 것뿐이다.>(《가정신문》 1946년 6월 20일자)
      
      <통일정부고 단독정부고 이렇게 분류하기를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부수립에 통일이고 민족이고의 구별을 지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 겨우 삼천리의 좁은 땅, 겨우 삼천만의 작은 인구. 요것을 가지고 뭬 몇 조각에 나누어야 하는가>(《가정신문》 1946년 6월 24일자)
      
      <1945년의 이완용(李完用)인 북조선의 영웅(英雄)을 묵살(默殺)로서 매장(埋葬)하자. 이승만 박사가 통일을 부르짖을 때에 감연(敢然) 탈퇴(脫退)한 것도 공산당이요, 북조선에 북조선국을 따로 세워서 한국의 한 귀퉁이를 떼어내고자 한 것도 공산당이요,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란 것을 국가인지 정당(政黨)인지 구락부(俱樂部)인지 알기 힘든, 꾸며내어 또다시 부스러뜨려 보려고 동작(動作)하던 것도 공산당회 내의 관계인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이요…>(《가정신문》 1946년 6월 26일자)
      
      
      “겨우 한마디 말씀밖에 안 하셨다”
      
    김동인과 오랜 인연을 맺은 소설가 정비석.
      동인은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이념으로 갈라진 작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별을 선언하고 침묵을 고수했다고 한다. 침묵에는 자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신당동 집에서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우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방은 자식이나 아내에게도 금족령이 내려졌다. 3녀 은환(銀煥)씨는 1963년 《여상(女像)》 2월호에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수마저 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으로 병이 없어도 누워계시는 아버지. 방은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금족령이 내린 구역이었다. 특별한 경우란 어쩌다 아버지의 무료가 극에 달했을 때와 설날 세배할 때, 사면(四面) 벽과 천장으로 외계와 가로막힌 조그만 육면체 속에서,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서적으로도, 방안을 뽀얗게 만드는 담배로도, 끌 수 없으리만큼 심심한 날이면 금족령이 풀린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백과사전의 괴물들을 손가락으로 짚기도 하고 종이를 접어도 보며 제법 즐거웠지만 그 시각이 나고 나면 우린 곧 물러 나와 거의 신비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 방 속에서의 아버지 생활을 그려보곤 했다.>
      
      침묵은 자신이 아끼던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 선생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동인이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춘문예 공모에 소설 <성황당(城隍堂)>으로 등단한 인연이 있다. 정비석은 1962년 12월호 《현대문학》지에 기고한 <동인선생회고기>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중앙신문》 문화부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거의 매일같이 지나시는 길에 내 방에 들러주셨지만, 내가 몇 마디 말을 해야 선생은 겨우 한마디 말씀밖에 안 하셨다. 그러면서도 후배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극진하셔서 내가 청탁하는 원고라면 한번도 거절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써주셨다.>
      
      
      수의도 없이 묻히다
      
      1951년 1·4후퇴 당시 동인의 가족은 피란길에 올랐다. 그러나 병색이 깊어 자신은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 김종욱씨의 말이다.
      
      “동인 선생은 당시 대소변도 못 가릴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고 해요. 김경애 여사와 가족이 동인을 일으켜세우려 했는데 문지방을 못 넘었다고 합니다. 억지로 데려가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이때가 1·4 후퇴 직후였어요. 김 여사는 곧바로 수복될 줄 알고 남편을 두고 피란길에 올랐어요. 그러나 3년이 지난 1954년에야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산 피란촌에서 김 여사가 우연히 정비석을 만나 눈물로 남편 얘기를 했다고 한다. 1952년 1월 초 정비석은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왔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동인의 집이었다. 
      
      “정비석이 안방에 들어갔더니, 노인 한 분이 누워 있더라는 겁니다. 안경 쓰고 수염은 덥수룩하고 홑이불 덮고 있어서 동인인지 몰랐다고 해요. 앉아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선생이었다는 겁니다. 놀라서 코 밑에 손을 대니 온기가 없었고 손으로 일으켜세우려 하니 장작개비처럼 뻣뻣했다고 합니다. 죽은 지가 족히 1년은 됐을 텐데 정비석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요. 그때 김 여사의 말이 떠올랐다고 해요. 1년 전 피란 갈 때 필요할 때 쓰라는 뜻에서 동인의 요 밑에 3만원을 넣어두었다는 겁니다. 정비석이 요 밑에 손을 쑥 넣으니 한뭉치의 돈이 나오는데 세어보니 꼭 3만원이었다는 겁니다.”
      
      동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빈집에서 혼자 세상을 뜬 것이다. 이어령 장관의 부인인 문학평론가 강인숙씨는 “수의(壽衣)도 없이 언 땅에 묻힌 그의 죽음은 오스카 와일드의 최후를 연상시킨다”고 썼다.
      
      김종욱씨는 아직 동인의 글을 찾을 게 더 많다고 한다. 한창 시절, 자유분방했으며 글쓰기에 광분(狂奔)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제 평생 소원이 뭔지 아세요? 동인 선생이 한때 만주에서 기거하며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하 장편역사소설 <서총대(瑞蔥臺)>(연산군 시대 역사물)를 연재하였다는 확인된 사실을 접하고도 아직 그 신문의 소장처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일제 치하 동인의 최후 역작 〈서총대〉를 어떻게 하면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평생 풀지 못할 영원한 숙제입니다.”⊙



    미발굴 자료


    ⊙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시비(是非) 다 집어치우고 국가를 찾기에 힘쓰고…
    ⊙ 선전(宣傳)과 모략(謀略)은 공산당의 가장 크고 힘센 무기
    ⊙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요긴(要緊)한 제도(制度). 
        이것을 모르는 것은 큰 ‘철’ 부족

    [편집자 주]
    《월간조선》 4월호는 1946년 《가정신문》 4월 3일과 4일에 걸쳐 실린 <한인(韓人)이기에>, 같은 신문 5월 25일자에 실린 <내 나라>, 6월 4일자에 실린 <자라는 일본>, 6월 19일자부터 26일까지 8회에 걸쳐 실린 <남조선 단독정부? 아니! 중앙정부>(3, 4회는 결본), 6월 27일자에 실린 <철>, 7월 1일자에 실린 <가정교육과 조선혼> 등을 싣는다. 다른 작품은 7월호까지 연재할 예정이다.
      <韓人이기에-5>
      
       아메리카 군이 북위 38 이남의 조선의 정치를 맡아가지고 인정, 풍속, 제도, 기후, 습관이 모두 전혀 다른데 한국을 어떻게 하면 □ 다스리는가. 어떻게 하면 이 백성들로 하여금 이전보다 좋은 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하겠는가. 이 문제로 갈팡질팡 고심하는 양은 사실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우선 원주민인 한인에게 배척 아니 받고 세계 각국에 면목 서고 일본에게 비웃음 안 사고 소련에게 ‘그대 너와 어떤가’고 놀랄 수 있게 어떻게 하면 좋은 경의를 펼 수가 있을까. 사실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지니고 한국 때문에 땀을 뻘뻘 뺀다. 그런데도 쌀이 문제다. 쌀을 먹지 않는 인종임에 쌀 문제에 관해서는 절실미가 통제될지 모른다.
      
      주식물(主食物)의 결핍에 대한 곤란을 공식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잘 안다. 하지만 그러나 시제 겪고 굶은 사람과 비기자면 절실미가 훨씬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직(職)을 도(蹈)하여 ‘하지’ 장관에게 ‘미곡(米穀) 정책’을 진언(進言)할 보조관(補助官)이 없고 장관 자신은 아직 한인화(韓人化)되지 못하였으며 이 위급한 찰나에 꼭 적합된 정책은 안출하지 못한다.
      
      장관이 아는 한국 사정은 옷을 격하여 가려운 데를 긁는 - 그러한 정도였다. 쌀이 없어 사람들이 굶을 지경이라, 어떤 말을 들어도 ‘부엌에 한 알의 쌀도 없어서 엊저녁도 굶고 조반(朝飯)도 못 지었다’는 급박한 사정이 아니요, ‘빨리 해결책을 세우지 않으면 굶을 호구(糊口)가 많다’는 의식 정도로 인식하는지라. 그러니까 ‘아홉 말 이상 가진 사람은 내놓으라’ ‘애국심을 말하라’ □□ □□□(□는 판독 불가-편집자註) 분부를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어제 저녁도 끼니를 못 지어 먹은 새면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충성되고 훤칠한 보조관이 상관의 자존심을 꺾으면서라도(□ □□도하면서라도) ‘당신은 조선의 사정에 어둡기 때문에 시정(施政)에 그릇된 점이 많소’하며 한인의 형편이며 사정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사실 한국을 사랑하고 한인을 행복케 하려는 그네들이 □□□□□ 잘 설명만 하면 아직껏 고집하던 자존심을 굽히고 정책을 고쳐서라도 다시 새 정책을 세울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4월 3일)
      
      
      <韓人이기에-6>
      
      쌀 문제를 보아도 지난 일은 할 수 없거니와 이제부터라도 할 일을 자유롭게 하고 최고 가격의 금을 결제하면 좀 다른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 결제의 의사다.
      
      이 의견은 어느 국한된 사람만 - 즉 농촌인이든가, 도회인이든가 이런 일부만의 희망이 아니요, 한인 전체의 의견이다. 쌀의 최고가의 철폐, 판(매)업 제한의 철폐 - 이 두 가지는 현하(現下)의 절박한 비극 문제를 해결할 유일의 길로서 농민, 도회인, 지주, 지방인 할 것 없이 한인 전체가 그 두 가지를 철폐하면 쌀의 유통(流通)도 좀 나아질 것이요, 값도 떨어질 것이라는 의견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철폐되지 않아서 돈이 있어도 쌀을 살 수 없고 쌀이 있어도 자유로 가져올 수가 없어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앉아 있는가. 그러한 결심을 사정이라는 점을 치자(治者)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즉 좋은 보조(補助)들이 있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아뢰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사정에 어두운 치자들은 유유할 토지, 재산, 미곡, 중상(中商) 등 만업지계만 꿈꾸고 있는 것이다.
      
      ‘쌀을 외국에 너무 많이 밀수(密輸)해서’ 또는 ‘한인의 애국심이 부족하여’ ‘쌀 가진 사람이 그냥 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쌀 부족의 변명이다.
      
      모두 잠꼬대다. 지금은 변명의 시기가 아니다. 밀수출을 못하게 해서 이 땅 안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위정자(爲政者)의 할 일이 아닐까. 사람의 배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어서 쌀이 모자라고도 □먹는 인종 일본인이 그만큼 줄었고, 더욱이 풍년에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라도 밀수출만 절대로 막고 국내 운반을 용이하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급을 정확히 해주든지 하지 않으면 이 난국을 뚫을 길이 없을 것이다. 쌀 먹는 민족이 이 땅의 정세를 잡았으면 체면 유지하자는 고집은 깨끗이 청산하고 다른 정책을 써서 지금 같은 기아경(飢餓景)에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징병자(徵兵者) 징용(徵用)에서 돌아오고, 38선 이북에서 쫓겨 오고, 소개지(疏開地)에서 돌아오고, 쌀을 한 알이라도 산출(産出)치는 못하는 ‘서울’에 쌀 먹는 식구는 엄청나게 늘었다. 그런데 쌀은 서울로 가져오지도 못하게 하고 배급도 아니 주니,
      
      1. 쌀을 산출치도 못하고
      2. 가져오지도 못하고
      3. 배급도 정확히 아니 주고
      
      세 가지 길이 다 막혔으니 서울 사람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쌀 먹는 사람이 정치를 잡든가 그렇지 않으면 철저히 한인의 생활을 이해하고 있어야 해결이 될 것이다.
      
      쌀은 서울로 가져오지도 못하게 하고 배급도 안 주니 서울 사람은 공기만 먹고 살 수 있도록 체질이 변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밖에 도리가 없다. 먹을 것도 없는 이 판에 쓰고 살 형편이 없지 않은 이 시국에 징용에서 돌아온 젊은이들과 소개해 갔던 사람이며 38 이북에서 쫓겨 온 사람들로 서울의 호수는 매우 늘었다. 늘었으면 는 만큼 주택(住宅)도 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이 모두 물러갔기 때문에 빈 집도 꽤 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의 집 자리는 군정청(軍政廳)의 소유로 되어서 조선 사람의 몸으로는 군정청의 사글세 든 사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좀 크고 깨끗한 집은 죄다 주둔군이 잡았다.
      
      일본인의 재산은, ‘□□’이니 군정청에서 몰수하는 데 이의를 말할 수 없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4월 4일)
      
      
      <내 나라>
      
       작년 8월 보름 이래 우리 한인(韓人)이 처하여 있는 입장은 사실 초비상(超非常) 사태이다.
      
      8월 보름날 일본 황제 유인(裕仁)이 그 신성하다는 입을 열어 눈물 섞인 소리로 ‘카이로 선언(宣言)’을 수락한다는 방송을 한 그 순간부터 그새 40년간을 조선을 뺏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주권(主權)은 소멸(消滅)되고, 한국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자기의 언어를 가진 민족은 아주 멸망하는 법은 없다는 원칙에 따라서 언제든지 한국은 일본의 굴레를 벗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길이 멀고 그날을 기다리던 때였지만 하늘을 찌를 듯한 일본의 손아귀가 언제 어느 날 경일지는 사실 기약이 아득한 때였다. 우리의 당대(當代)에는 ‘나라 가질 인종(人種)’ 노릇은 못해 볼까 보다 단념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늘은 이 가긍(可矜)한 한인의 처지를 돌보시어 꺾일 날 없을 듯하던 일본의 힘을 꺾어주시어 한국은 저절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라 없이 지나온 40년간 우리 한인의 마음에 저절로 생기고 자라난 고약한 성질은 그냥 남아서 해방의 오늘날 우리의 기분을 암담하게 하고 걱정스럽게 한다.
      
      첫째, 우리에게는 민족애(民族愛)라든가, 애국심(愛國心)이라든가, 이런 관념(觀念)이 부족하다. 그새는 나라가 없으니 이런 관념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남을 해(害)하면서라도 나 하나 부귀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너무 앞섰다. 오늘날 해방의 국가를 좀 먹는 모리배(謀利輩)가 국가야 어찌됐던 간에 나 하나 잘살면 그만이라는 ‘국가를 못 가져본 시절’에 배양(培養)된 사상이다.
      
      이전에는 사실 내 나라가 아님에 나라래야 해롭든 이롭든 나 볼 장이나 보았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때 배양된 그 생각을 ‘내 나라’ 가진 오늘에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결코 되지 않을 일이다. 손톱만치라도 나라에 해로운 일은 직접 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삼가야 할 것이다.
      
      남자가 사회에서도 그러해야 할 것이지만 부인네가 가정에서도 모든 일에 ‘내 나라’라는 생각을 잠시 한때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더부살이 할 때의 심리를 아주 깨끗이 씻어버리고자 하면 이로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내 나라’다. 이 나라에 해로운 일은 즉, ‘내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이 생각을 잊지 말고 해방의 길을 걸어가자.(출처=《家政新聞》 1946년 5월 25일)
      
      
      <자라는 일본>
      
       최근 일본서 건너온 소식에 의거하건대, 일본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이 동창생 두 명을 때려죽였다 합니다. 때려죽인 까닭은 그 맞아죽은 두 학생이 낙제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온 국민이 힘을 합하여 패망(敗亡)하려는 나라를 건지어야 할 초비상(超非常)시이다. 이전에 한 시간 공부하던 것은 두 시간, 세 시간을 해야 하고 한 사람이 물을 때를 세 돌씩 감당을 하여 오늘의 국운(國運)을 만회(挽回)하여야 될 것이다. 이런 비상시국에 있어서 낙제란 웬 말이냐. 낙제하는 따위의 인생은 나락 버러지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 인생은 일본 국가에는 유해무익(有害無益)하니 미리 죽음만 같지 않다’ 하여 때려죽였다 합니다.
      
      사실 일본은 지금 국운 만회에 없는 힘까지 모두 짜내어 노력합니다. 그런지라 모리(謀利)의 간상(奸商)이 없음에 물가가 싸서 국민 생명이 안정되고 소학생(小學生)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업에 힘쓰니 불량소년이 없고 온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라 회복에 힘쓴다 합니다.
      
      그런지라 일본 공산당이 있다 하여도 그것도 일본을 위하는 일본 공산당이요 사회당이 있다 하여도 일본을 위하는 일본 사회당으로서 우리 조선같이 내 나라를 소련 신탁통치 아래 두자는 공산당이 아님에 일본국은 가까운 장래에 다시 ‘대 일본국’으로 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 소식에 우리 조선사람된 자 가슴이 서늘하고 오금이 타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해방된 지 1년이 가까운 오늘날도 아직 국가가 통일되지 못하고, 정부가 서지 못하고, 나라는 북위(北緯) 38도선(度線)으로 두 토막에 나누어져 북조선의 남편이 남조선의 처자(妻子)와 안부조차 알지를 못하고 지나고, 물자는 피가 나도록 비싸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리 행위와 음모(陰謀)의 다툼자리만 일삼고 있으니 언제 나라가 일장 되겠습니까?
      
      일본이 그 독한 양심(良心)으로 국력(國力)을 회복해가지고 머리를 둘 때에 우리 조선이 그냥 혼돈천지(混沌天地) 그대로 있었다가는 어찌될 것입니까? 모골(毛骨)이 송연한 일이외다.
      
      우리도 우선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시비(是非) 다 집어치우고 국가를 찾기에 힘쓰고 그 찾은 국가를 키우기에 힘써서 남이 따를 수 없는 훌륭하고 튼튼한 나라의 주역(主役)이 되기에 온 힘 다 내어야 할 것입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4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1>
      
       우리의 국보(國寶)요, 우리의 국노(國老)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할아버지인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요즈음 남조선(南朝鮮)을 시찰하시는 도중에 어느 지방에서 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까닭 없이 휴회(休會)가 된 지 한 달이 가까운 오늘까지도 다시 무슨 소식이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국권(國權) 찾기를 위하여 자율적(自律的) 기관(機關)을 세울 필요가 있다”
      
      라는 강연이, 일부 매국자들의 말썽을 일으켰다.
      
      “이 박사는 남조선 분립정부(分立政府)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 박사는 조선을 두 조각으로 떼서 북조선은 남에게 주자고 했다.”
      
      “이 박사는 조선의 통일을 막고 국가를 분열하려 했다.”
      
      말 꾸미기를 길게 하고 꾸미는 수단의 능함을 스스로 자랑하는 무리이니 무슨 말인들 못하랴마는 이 박사의 강연이 주석(註釋)이 붙지 않으면 이런 트집을 잡을 수 있을 만한 틈새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방역진(防役陣)의 틈새를 뚫고 침입하는 전염병균과 같이 이 틈새로 그런 ‘테마’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박사의 강연의 요지(要旨)를 다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한다던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흐지부지 휴회(休會)가 되어 언제 재개(再開)될지 기약(期約)이 망연(茫然)하니 우리 한인(韓人)은 이 기약 망연한 재개일(再開日)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 삼천만은 한시가 급하게 정부를 가져야겠는데 헛되이 남의 눈치만 엿보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는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은, 남의 처분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다. 본시부터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지만 미소가 호의적(好意的)으로 협조를 해주겠다고 하니 그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서 원조를 받기로 했던 것인데, 지금 무슨 갈등으로 회의(會議)가 재개될 기약이 망연하니 우리는 본시로 돌아가서 우리만의 힘으로 우리의 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물론 수부(首府)는 남조선의 한 계역(界域)인 서울로 할 것이요, 현재 38 이북과는 연락이며 협의를 할 수 없는 기괴한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임에 북조선의 국민과 한 자리에 한 마음 협의할 수 있는 한 민족의 협의를 모아서 우리의 기관을 세우자. 그리고 이 기쁨이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여 우리나라를 두 토막 낸 38선을 철폐하여 국토(國土)를 전부 다 회수하고 국권을 회수하자. 꼭 우리는 세계무대를 상대하여 훌륭한 민족 홍익(弘益)의 기쁨, 정부를 하루바삐 세워야겠다.”
      
      대략 이런 뜻이다. 즉 남조선이고 북조선이고 할 것 없이 한인(韓人)의 힘으로 □□□ □□□ 세우자고 한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 현재 38 이북은 일종의 괴뢰(傀儡)랄 수 있는 겨레요,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특수지역이니 서로 무릎을 맞대고 의논할 수 없고 부득불(不得不) 남조선 주민과 □ 현재 남조선에 와 있는 북조선 사람들의 합할 의견이 온 한인의 의견이라 볼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19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2>
      
       이 박사의 의견을 저들은 뒤집어 잡아가지고,
      
      “남조선만의 단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조선을 두 토막 내어 북조선은 아주 내버리자고 한다”고 악선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인(韓人)된 자 그들의 이 악선전에 추호(秋毫)만치라도 흔들리어 이 박사를 의심하랴?
      
      과거 70년간을 한결같이 오직 한국을 위하여 싸워온 이 박사가 지금 마지막 판에서 ‘국토의 절반과 국민의 절반과 국부(國富)의 절반을 포기하고 절반만으로 살아가자’는 변절(變節)을 하랴?
      
      박사의 마음에는 다만 국가가 있을 따름이요, 한국의 자주독립이 있을 따름이다. 나라라 하면 삼천 리의 한국 전체이지 남조선, 북조선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박사가 만약 남조선만의 단독정부라도 어서 세워야겠다 하였다 하면 그것은, ‘현재의 경제상 부득이한 상태이니 남조선의 지역에 남조선 현 주민을 주체로 삼은 과도기적(過渡期的) 기관이나마 어서 세워서 이 기관이 국제적으로 활동하여 온 한국을 찾아내야겠다’는 것이지, 모략(謀略), 허언(虛言)같이 38 이북은 영영 단념하고, 남부(南部)만으로 자그마한 나라를 세우자는 것은 무론(毋論) 아니다.
      
      무함(誣陷)하는 그들도 무론 속으로는 자기네의 비열한 행사를 시인(是認)할 것이요, 스스로 자기네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또한 자기네의 자손을 둘러볼 때에 장차 자손들이 장발(長髮)하여 자기네의 부조(父祖)가 옛날 행한 비열한 행사 때문에 얼굴을 못 들고 사람 축에 끼지 못할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양심에 꺼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이완용(李完用)이 나라를 팔아서(이완용도 단지 물욕에만 탐낸 것이 아니라 실상은 어떻게 해야 조선민족이 행복되리라는 그릇된 판단으로 매국한 것이다.) 부귀(富貴)와 작록(爵祿)이 겸비(兼備)한 일생을 보냈지만 서울 시내에 ‘이완용의 식당’ 아닌 공동변소가 없고 치욕의 일생을 보낸 것은 그들에게는 좋은 전철(前轍)이다.
      
      헴치기(水泳)에 능한 자는 물에 빠져죽고 말 꾸미기에 능한 자는 말로써 망한다.
      
      이승만 박사가 별로 깊은 뜻 없이 발언한 ‘남조선만이라도 어서 무슨 귀정(歸正)을 지어야겠다’는 말을 기화로 삼아 천백(千百) 가지로 얽어매어 이 박사를 무함(誣陷)해서 ‘이 박사는 북조선을 영 포기(抛棄)하잔다’, 어쩐다 한 반역론자(反逆論者)들은 결국 그들의 본시(本是)의 목적인 ‘이 박사와 한인 대중의 이간(離間)’은 성공치 못하고 이 박사가 명료(明瞭)치 못하게 발언했고 강연의 본지(本旨)를 더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철저(徹底)시킬 기회를 준 것뿐이다.
      
      선전(宣傳)과 모략(謀略)은 공산당의 가장 크고 힘센 무기이다. 공산당(세계의)이 오늘의 대(大)를 이룬 것은 모두가 선전과 모략의 산물(産物)이다. 그러나 조선의 공산당인 ‘조선 공산당’은 그제 일본제국주의의 탄압 아래서 충분히 알아 바뀌어보지 못했던 만치 선전과 모략의 전술(戰術)에 그다지 세련(洗鍊)되지 못했다.
      
      작년 일말(一抹)의 반탁(反託)에서 찬탁(贊託)으로의 돌변(突變)이며 이번 지폐위조사건(1946년 서울에서 발생한 위폐사건. 조선 공산당 당원인 은행직원이 10만원의 위폐를 만들다 적발되자 남한의 공산세력과 미군정이 정면충돌했다-편집자註)의 변명(辯明) 선전전(宣傳戰)의 서투름 등은 이 점을 잘 설명하는 바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0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5>
      (연재물 3, 4회는 신문이 결본되었다-편집자註)
      
       이 박사의 □□ □□ □□□□ 고향을 북조선에 가진 이 박사가 □고향을 버리자는 주장은커녕 생각조차 할 까닭이 없다. 더욱이 한국 신문화의 발상지(發祥地)요, 해방운동의 발상지인 38 이북 지역은 한국 존립(存立)상 없어서는 안 될 □□ □□이요, 무진장(無盡藏)의 광산(鑛山)들과 무진장의 임산물(林産物)과 거대한 발전소를 가진 38 이북 지역은 한국의 국가 경제상 없어서는 안 될 지역이다.
      
      대국(大國)이 되기에는 삼천리(三千里)라는 땅이 벌써 좁고 삼천만이라는 국민이 수가 벌써 작은데 □□ 북조선까지 떼어버리면 무슨 꼴이 되랴. 이 박사가 삼척동자(三尺童子)가 아닌 이상, 이런 생각을 꿈엔들 할 리가 없다. 이 이치(理致)에도 맞지 않는 말까지 꾸며대어 이 박사를 무함(誣陷)하는 까닭은 이 박사가 밉다기보다 한국정부의 성장이 무서운 때문이다. 이 박사가 주장하는 바의 ‘한국정부’를 남조선만의 정부라 거짓 선전하여 한인으로 하여금 이 박사가 세우자는 정부에 반대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자 함이다.
      
      현재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북조선만이 벌써부터 가지고 있다. 남조선은 미국인이 관할하는 군정청(軍政廳)이 있는 대신에 북조선에는 한인(?)으로 조직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있다. 표현은 한인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일거일동(一擧一動)이 모(某) 국가(國家)의 줄다리기 아래 놀아나며 한인의 자유로운 의사(意思)로 운용(運用)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남의 지휘 아래에서나마 일을 운용하는 한인 요인(要人)은 한인(일반 인민)의 공선(公選)으로 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 모(某) 국군의 기관□ 보호 아래에서 공산당원만으로 조직된 것으로서 본시(本是) 온 한인의 인종(人種)으로 선임되었던 조만식(曺晩植) 선생은 기관□ 아래에서 위원장의 자리를 내어놓고 현재 피(被) 감시(監視) 생활을 하고 있고 동시에 민주주의 진영은 통틀어 쫓겨나고 공산주의자만으로 인민위원회는 조직되고 운용되고 있다.
      
      즉 단독정부를 □□자는 공산당이요, 북조선만을 갈라 떼낸 자는 공산당이다. 그들의 세력은 □□군의(이하 12자 판독불가-편집자註) 기관□은 38 이남에는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부득불(不得不) 북조선만의 단독정부 이상은 세울 힘도 없고 권리(權利)도 없다. □□군의 기관 □만 물러가면 한 시간도 유예(猶豫)치 않고 국민의 힘으로 그 허수아비 정권은 박멸(撲滅)이 될 것이다.
      
      즉, □□군의 기관□은 북조선 이외의 지역에는 세도(勢道)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 세력 아래에서 생긴 정권은 한지정권(限地政權)일 밖에 없고 그 기관□ 세력을 빙자(憑藉)하려는 일부인만의 준동(蠢動)이며 그 정권은 한인(限人)정권일 밖에 없고 또 □군이 주둔(駐屯)하는 동안만 시도(試圖)할 것이며 또한 한시정권(限時政權)일 수밖에 없다.
      
      그들(공산당) 자신이 그런 기형적 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박사가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할 때, 자기네들이 미루어 짐작하기를, 이 박사가 한지(限地)정권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 속이 타, 한지정권이든 무엇이든 남조선에 정권이 생기기만 하면, 이곳에는 자기네를 보호해 줄 □□군의 기관□이 없으니 자기네의 몰락(沒落)이 방약관화(傍若觀火)라, 악(惡)에 받쳐 이 박사의 제창(提唱)에 반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박사가 제창하는 것은 남조선만의 한지(限地)정권이 결코 아니다. 삼천리를 그리고 삼천만을 포용(包容)하려는 거국(擧國)정부이다. 현재 □□군의 기관들이 38선을 지키고 우리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으며 행정권과 사법권이 38 이북에까지는 당분간은 못 미칠는지는 모르지만 국제적으로 강토(疆土) 삼천, 국민 삼천만을 다스리는 것은 한국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3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6>
      
       통일정부고 단독정부고 이렇게 분류하기를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부수립에 통일이고 민족이고의 구별 지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
      
      겨우 삼천리의 좁은 땅, 겨우 삼천만의 작은 인구, 요것을 가지고 뭬 몇 조각에 나누어야 하는가.
      
      아마 시작은 38선이라는 현실에서 발단(發端)되었을 것이다. 소련(蘇聯)이 38선 폐지를 그냥 반대 고집하여 완전 두 개의 국가가 있는 듯한 현실에다가 북조선 인민위원회(즉, 정부다)가 소련 군정과 별개로 생겨나서 북조선의 행정(行政)을 맡아보아서 북조선은 함께 별개 국가인 듯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의 요인(要人)들이 ‘정부 운운(云云)’하던 연상적으로 ‘남조선 단독정부’(마치 북조선 단독정부와 같이)를 운운하는 것이거니 하는 속단(速斷)과 곡해(曲解) 앞에서 문제가 차차 커진 것일 터다.
      
      그러나 만사(萬事)에 은폐적(隱閉的)이 아니요, □□적이며 음모적이 아니요, □□□이며 독재적이 아니요, 맨주먹인 남조선에서는 모략(謀略)을 모른다. 정부라 하면 그저 정부를 말하는 것이지, 남조선 단독정부라는 것을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사가 모략적이요, 음모적으로 생긴 인류는 다른 사람이 예사로이 하는 언행(言行)이라도 반드시 모략적으로 음모적으로 보고 해석한다. 북조선과는 실제상 출석(出席)하여 회의(懷疑)할 수단이 없으니 부득불 합석상의(合席相議)할 수 있는 사람들만으로…….
      
      정부 혹은 그 대행기관(代行機關)이 시급(時急)히 필요한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서 피 흘리기를 아끼지 말자…… 이 몇 가지를 이리 뜯어고치고 저리 뜯어고쳐서 편집하고 개정한 것이 이즈막의 조선 공산당의 생명이다.
      
      지폐위조사건 때문에 그 조선 공산당에 집중되는 창끝을 회피하려는 한 술책의 산물(産物)이겠지만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된 조공(朝共)의 하는 노릇이라, 창끝을 돌리려던 노릇이 도리어 창끝 검끝 작살끝의 총 집중이 역(逆) 현상을 이룬 셈이다.
      
      조선 공산당의 현명한 중견 측 몇몇은 이 기세를 알아보고 당분간 세상의 표면에서 은퇴하여 건망증(健忘症)인 중우(衆愚)가 있을 만한 시기까지 잠자코 있다가 얘기를 다시 꺼내가지고 그날에 제출하기를 진언(進言)하는 모양이나 완고한 간부 측서 그냥 무모(無謀)한 교섭을 뻗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서로 새것으로 민족진영(우익 진영)을 꺾을 만한 강력한 모략을 안출(案出)하기를 엄명(嚴命)하는 모양이다.
      
      이 박사의 봉건적 부인이 발광(發狂)하여 어쩌느니 김 주석의 몇째 자제가 여사여사(如斯如斯)한 언명(言明)을 하였느니 많은 지모자(智謀者)들이 구수(鳩首)하여 안출(案出)한 데다 민족진영의 수령(首領)들의 개인 명예훼파(名譽毁破) 운동(運動)들로 하도 맹랑한 소리이어서 대중(大衆)이 신청치 않아 효과가 신통하지 못하였다. 이번은 대중이 숙고(熟考) 믿을 만한 이야기를 꾸며 올리라는 지령(指令)이 내린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해서 민족진영의 수령(首領)들을 사회적으로 배짱째 해보려는 동시에 밖으로는 정치가적(政治家的) 생명을 꺾기 위하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을 꾸며 내었으면 약이 올라서 침착과 냉정을 잃은 그들의 꾸며낸 안(案)이라 역시 예상(豫想)한 효과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선전과 같이 이 박사가 남조선 단독정부를 목표한다 한 것도 사실 현재의 남조선 주변들은 단독이든, 통일이든지를 관계치 않고 어서 바삐 정부가 생기기만 바라고 있다. 맥주(麥酒)의 생명은 의식주(衣食住)에 있는 것이다. 통일이든 단독이든 간에 어서 정부가 서주어서 이 도탄(塗炭)을 면제해 주기만 하는 판이니 단독, 통일은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형편이라 이 박사가 남조선 단독정부를 외쳤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일반 대중은 이 박사를 배척하지 않을 형편이다. 하물며 이 박사의 뜻은 한국 중앙정부이지 결코 남조선 독립정부가 아님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4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7>
      
       지금은 없는 모양이나 요 몇 해 전까지도 어림하다가 이 관계 약속을 하면 할 때마다 벌써 거리에 구두 수선인이 드나든다. 마루에 놓인 구두를 몇 켤레 저들이 상세히 검문하여 반드시 무슨 흠집을 발견하고야 만다. 새로 지은 구두일지라도 무슨 흠집이든 반드시 발견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그러고는 방 안에 □□ 손님을 향하여 지긋지긋하게도 수선하기를 졸라댄다.
      
      그때 느낀 바이다.
      
      남의 구두를 반드시 □□ □□□□ 발견해가지고 그것으로 밥을 먹는 직업은 참 가여운 것이라고. 새로 지은 구두에서라도 꼭 무슨 흠집이든 찾아내려는 그 심사는 가증(可憎)하지만 그것을 찾아내어야 밥을 먹여갈 수 있으니 그런 딱한 직업이 어디 있으랴.
      
      민족진영의 수령□□ 하다 못해 사행(私行)에서라도 무슨 트집을 잡아내서 못하면 배가 아파하는 공산당원의 마음보와 구두 수선인의 마음보와 어느 편이 더하고 어느 편이 덜할까. 매 한가지로 딱한 인생들이다.
      
      □□군의 기관□의 보호 아래에서 북조선만큼 정권을 꾸려가지고 □□군의 이름 아래에서 갖은 폭행(暴行), 난행(亂行), 교란(攪亂) 등을 마음대로 하던 조선 공산당은 자기네의 행함만 같이 있는지라 남조선에 민주(民主), 민족진영의 단독정부가 생겨나지나 않나 전전긍긍(戰戰兢兢)하던 차에 이 박사의 모계 당에서의 강연을 그만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주장으로 속단(速斷)하고 그것을 막아보고자 갖은 악을 다 쓰는 것이다.
      
      그들이 들쑤시는 ‘남조선 단독정부’는 본시부터 목표한 바 아니니 그들의 반대와 방해가 아닐지라도 생각지 않는 바이나, 그 배신은 삼천리를, 온 삼천만을 등에 업은 중앙정부를 지금 바야흐로 □□□□ 있으며, 이 박사, 김 주석(主席), 김 박사 등 든든하고 노련(老鍊)한 지도자의 좋은 지도 아래에서 온 한인(韓人)의 지지와 성원 아래에서 온 세계의 축복과 후원 아래에서 지금 탄생의 진통(鎭痛) 중에 있는 것이다. 공산분자들을 가리켜 ‘남조선 단독정부’라고 폄(貶)하고 미양청(?)하고 간에 어떤 야심적 국가가 애써 훼방(毁謗)하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확연(確然)한 의사(意思)가 아닌 남의 의사와 남의 의견 아래에서 생긴 기존(旣存)의 저 땅의 정권인 북조선 인민위원회라는 마치 왕조명(王兆銘) 정권류(政權類)요 만주제국(滿洲帝國) 정부류(政府類)의 허수아비 정권을 무시하고 우리 진정한 한인(韓人)[가한인(假韓人)이 아니요 한표(韓表) □심(□心)계의 한인이 아닌]의 의사로 한인의 힘으로 한인의 뜻으로 한인의 손으로 우리의 정부 혹은 그 준비기관에 전폭(全幅)의 신뢰(信賴)와 성원(聲援)을 아끼지 말자.
      
      1945. 8. 15 이전에 세상 떠난 우리의 동료(同僚)와 선배(先輩)들이 무덤 속에서 내가 왜 조금만 더 장수(長壽)하지 못하였던가 하고 정치 할 세상을 건설하기에, 우리의 온 힘을 바치기를 아끼지 말자.
      
      이 박사가 제창하고 우리가 뒤따르는 것은 결코 저들이 무함(誣陷)하는 것 같은 남조선의 단독정부가 아니요, 우리 삼천리의 땅과 삼천만의 국민을 몸에 품은 한국 중앙정부라는 것을 말[언어(言語)]로 보다 실상으로 어서 바삐 저들 반역분자의 코앞에 내어 보이어 저들로 하여금 다시 저주(詛呪)치 못하게 할 걸 우리의 연거푼 숙망(宿望)을 어서 달성(達成)하자.(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5일)
      
      
      <南朝鮮 單獨政府? 아니! 中央政府 - 8> (끝)
      
       또한 ‘포츠담’과 ‘카이로’에서 거룩한 성명(聲明), 한인(韓人)의 위대한 국가로 하여 식언(食言)하는 국가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약한 자를 돕는다’는 그들의 국시(國是)를 한낱 □□ □□ 장식에 그치지 않도록 우리도 거기 협조를 하자.
      
      동시에 또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하여 기억하여야 할 일은, 이 박사 지휘하의 한민족의 중앙정부 혹은 그 준비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 북조선 단독정부와 같이 공산주의자만의 국가(공산주의면 일본인이며 중국인이라도 꺼리지 않는) 같은 편당성(偏黨性)이 없는 관대(寬大)하고 포용력(包容力) 많은 정부 혹은 그 준비기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38 이북에서는 공산주의자 아니면 한인(韓人)이라도 박해(迫害)받고 부접(附接)받을 수 없어 쫓겨나고 하지만 장차 탄생(誕生)하려는 기관(機關) 아래에서는 모두 다 동료(同僚)요 형제가 되어 새 모습을 말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같은 한족(韓族)이라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안주(安住)할 수 없는 지역이 만 천리의 국내에 엄연히 자리 잡고 있다 하는 것은 기괴(奇怪)하고도 통탄한 일이다. 이것을 예사로이 보고 당연시(當然視)하는 것은 오직 공산당원일 뿐일 것이다.
      
      공산당원만이 안주(安住)할 수 있는 기형적(畸形的) 지대(地帶) 38선이 폐지되면 자연 이것도 없어질 것이다. 조선 공산당이 한사(限死)코 38선 철폐를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안주(安住)하는 국경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기형적(畸形的) 국경선도 중앙정부가 생기고야 비로소 철폐될 형편이다. 이모저모를 뜯어보아서 가장 긴(緊)하고 가장 급한 문제는 우리가 지배(支配)하는 우리의 정부가 하루바삐 생겨나는 것이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같은 북조선만의(그리고 □□로는 공산주의자만의) 정부가 아니요 남북을 합친 한국의 정부가 정부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하여 재건(再建)하고 돌진(突進)하여 성공의 열매까지 따자. 38 이북에는 북조선 단독정부가 있지만 그것은 공산주의자(그것도 북조선에 현주(現住)하는)만의 정부요, 한국을 두 토막 내는 패절(敗絶)하고 비열(卑劣)한 음모(陰謀)에서 생겨난 기관이니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고 우리의 길로 매진(邁進)하자.
      
      그리고 1945년의 이완용(李完用)인 북조선의 영웅(英雄)을 묵살(默殺)로서 매장(埋葬)하자. 이 박사가 통일을 부르짖을 때에 감연(敢然) 탈퇴(脫退)한 것도 공산당이요, 북조선에 북조선국을 따로 세워서 한국의 한 귀퉁이를 떼어내고자 한 것도 공산당이요,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란 것을 국가인지 정당(政黨)인지 구락부(俱樂部)인지 알기 힘든, 꾸며내어 또다시 부스러뜨려 보려고 동작(動作)하던 것도 공산당회 내의 관계인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이요, 이런 별별 수단(手段)을 다하여 한국을 부스러뜨려 보려고 공작(工作)하면서도 표면은 통일 단결을 □□□□ □□□□하는 가장 충신(忠臣)인 체를 가장(假裝)하는 조선 공산당.
      
      지금 한국 정부 혹은 거기 대신할 기관이 수립되면 그때야말로 말뿐인 곳도 없어지니 빨리 하는 것도 용혹무괴(容惑無怪)이기는 하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6일)
      
      
      <철>
      
       우리나라 말에 ‘철’이라 하는 것을 다른 나라 말에는 꼭 맞을 말이 없는 것 같다. 의미와 의미가 있어서 다른 나라 말로는 뜻이 같은 말은 있으나 묘미(妙味)까지 같은 말은 없는 것 같다.
      
      ‘철이 들었다.’
      
      ‘철이 났다.’
      
      ‘철이 있다.’
      
      ‘철이 없다.’
      
      지각(知覺) 혹은 경험(經驗)이라는 말이 같은 뜻에 쓰이고 대응(對應)할 수가 있으나 ‘철’이라는 말이 가진 그런 묘미(妙味)와 신산미(辛酸味)는 아무리 하여도 부족하다.
      
      그 ‘철’이 없는 인생을 ‘철’을 가르치기는 지난(至難)한 일로서 가르치려던 사람이 나중에는 화가 나서 내던지는 것이 십중팔구(十常八九)이다.
      
      경험(經驗)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철 부족’, 혹은 놓칠 수도 있고 지각(知覺)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철 부족’은 시정(是正)을 받고 있겠지만 천성적(天性的) ‘철 부족’은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런 인생은 예전에 가까이하지 않음만 못하다.
      
      그리고 □□□ ‘철 부족’ 인생이 존재(存在)하기 때문에 사회에 미치는 악 영향이 또한 적지 않아서 부족한 ‘철’의 풍류(風流)에 따라서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을 망치는 동시에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전반에까지 해(害)를 끼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요긴(要緊)한 제도(制度)요, 있을 수 있는 윤리(倫理)로서 이것도 모르는 것은 큰 철 부족이다.
      
      ‘웃어른을 몰라본다.’ 
      
      인간사회의 질서의 매 원칙은 이 ‘장유유서(長幼有序)’에서 출발한다. 웃어른은 과거의 공적도 많고 세상 경험도 많으니 그 어떤 제도를 따른다 하는 것은, 후계자 자신의 처세 □□□□□□ □□일이거니와 늙은이를 존경하는 인간노력(짐승과 달라)의 □□□□ □□□□하지 못할 문제다. 
      
      그런데 이즈음 철 부족 소년들의 도덕을 무시하는 언행(言行)이 너무도 자심(滋甚)하다. 그리고 감히 곁들이지 못할 이에게까지 함부로 덤벼드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런 것은 우리 국가의 도덕적 기초를 무너뜨리는 행위로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우리의 국시(國是)에 배제(排除)되는 일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6월 27일)
      
      
      <민족이간(民族離間)의 모략(謀略)을 배격(排擊)하자>
      
      적재적소(適材適所)란 말이 있다. 즉 적당한 사람을 적당한 곳에 쓴다는 말이다. 아무리 능(能)하고 만병(萬病)을 다 고치는 명의(名醫)라도 시계 수선소(修繕所)에 갖다 놓으면 감당치 못할 것이요 바느질의 명수(名手)를 대장간에 갖다 놓으면 일을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해방된 우리나라의 지금 현상은 어떤가. 과연 적재적소(適材適所)가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민간의 회사는 모르지만 행정(行政) 당국의 관청(官廳)은 경력이나 기술(技術)을 가진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행정관은 행정의 경력자라야 할 것이고 경찰관은 경찰의 경력자라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어늘 지금 우리나라의 행정은 그렇지 못하니 행정이 뒤죽박죽이요 경찰 사무가 필경 정확하지 못하다.
      
      그런 당면(當面)의 경력자라는 것은 예전의 일본 시절의 관리(官吏)이던 사람이어야 할 것인데 그런 사람은 소위(所謂) 친일파(親日派)라 하여 경원(敬遠)해 버리니 일이 이 모양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 시절의 관리이던 사람은 멀리해 버려야 할까. 직업상 그 길로 나섰던 사람은 멀리 하려면 얼른 법률(法律)의 보호하에 장사하던 사람이며 생활하던 사람을 모두 다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론(理論)은 민족을 분리(分離)하고 민족을 이간(離間) 붙이려는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의 무리가 꾸며대서 선동(煽動) 삼는 주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국권(國權)을 회복(恢復)해서 거룩한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런 야(野)스럽고 고답적(高踏的)인 인사(人事)에 영향받아 민족끼리 서로 눈 흘기고 경계(警戒)하는 흉(兇)스러운 생각을 버리고 한인(韓人)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이면 민족을 과히 해친 극악문자(極惡分子)를 제(除)하고는 모두 관대(寬大)하게 우리의 품에 끌어넣어야 할 것이다. 민족을 교란(攪亂)하고 이간(離間) 붙이려는 극악분자의 모략을 단연 일축(一蹴)하고 모두가 서로 마음을 풀어헤치고 한데 뭉쳐야 할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일)
      
      
      <가정교육(家庭敎育)과 조선혼(朝鮮魂)>
      
       가정교육이 적(適)할 것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부터 어리석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라는 동안 보고 듣는 것에 자인(自認)해 그 인격과 성격을 구성(構成)하는 것으로서 조상(祖上) 적부터의 옳은 적 성격도 이 생장시(生長時)와 경력(經歷), 경륜(經綸)으로서 얼마만치 입정까지 한다. 이 기간에 어린이들을 낳아 기르려고 좋고 나빠지고 하는데 따라서 그 어린이의 일생을 지배하는 성격은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지라 우리나라에서 몹시 관심(關心)하여 소위 ‘제위(祭儀)’ 혹은 ‘지벌(地閥)’이라는 것도 본시(本是)는 가정교육 ― 즉 점잖은 집안에서 길러온 영민(英敏)이는 보고 듣는 것이 모두 괜찮은 것뿐이다. 그 견문교육(見聞敎育)에서 자연 점잖은 성격을 구성하였으리라 하는 견해(見害) 아래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이 가정교육의 존귀(尊貴)한 책무(責務)를 걸리는 투(套)일 테다.
      
      진실로 무겁고도 무서운 책무(責務)이다. 그 지고(至高)의 잘잘못으로 복잡한 ―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운명까지 영향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본다. 8·15 이전 일정(日政)시대에 일본 정치는 온 조선인을 황민화(皇民化)하려고 소학교에서부터 전문대학교(專門大學校)에 이르기까지 교육 목표를 정해 그리로 치중(置重)하였을 그 시절에 그래도 조선혼(朝鮮魂)을 그냥 붙들어두고 명맥(命脈)이나 다 유지(維持)하려면 오직 부인(婦人)네의 자각(自覺), 부인네의 가정 훈교(訓敎)와 가정교육에만 힘입어야 할 그 당면(當面)에 어떤 부인네는 도리어 일정(日政)의 지도(指導)에 순응(順應)하여 가정에도 ‘가미다나’를 모시고 사랑하는 자녀들과 일본 말로 회화(會話)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명예로 알고 자녀들을 황민(皇民)으로 만들기에 노력하여서 그 이득(利得)이 해방 조선에 적지 않게 영향(影響)되고 있는 것을…….
      
      그 쉬운 ‘가갸거겨’ 하나를 안 가르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사람의 이름인지 물건(物件)의 이름인지 지방(地方)의 이름인지 모르게 기르는 백성에 ‘이로하’와 ‘아이우에오’며 일본의 신화(神話)며 역사(歷史)에는 능통(能通)한 일본인 척 조선인이 꽤 많이 있어서 8·15 이후 ‘나도 조선 사람이오’ 하고 전향(轉向)하기는 하였다. 하나, 시국(時局)의 추이(推移)를 따라 표면은 활활하였다. 하나, 어디서부터 가정교육에서 조선혼을 못 배우고 ‘야마도 다라이시’를 배운 그들이니 조선을 사랑하는 진실, 조선 동족(同族)을 사랑하는 정열(情熱)을 못 가지고 모리(謀利)행동, 반역 행동 등을 함에도 추호(秋毫)도 양심(良心)의 가책(苛責)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책임의 태반(殆半)이 부인네의 가정교육 등한(等閑) 혹은 그릇된 데 있는 바이다. 어찌 가볍게 볼 문제(問題)랴.(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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