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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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남산 / 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한겨레21,784호)社會/서울, 경성, 한양 2018. 3. 28. 19:10
돌아온 산, 남산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자유당 시절 국회의사당 이전 추진에 좌우익 집회장으로도 활용, 음독자살·화재도 많아제784호등록 : 2009-11-05 10:40 수정 : 2009-11-05 17:57 1959년 8월25일 오전 10시께 남산 인근에 사는 부녀자 30여 명이 호미와 삽을 들고 남산의 한 공사장에 몰려갔다. 당시 주민들은 서울시 과학관 자리에서 공사 중인 육군 공병대와 충돌했고 공사는 중단됐다. 주민들은 공사로 인해 길이 막히면서 남대문시장을 다니는데 큰 불편을 겪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앞서 5월 말부터 주민들이 서울시와 국회사무처에 항의를 해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는데, 비가 오는 틈을 타 공사가 다시 시작되자 부녀자들이 나와 항의를 한 것이었다.좌익에서 우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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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 독재정권의 개발 빙자한 학대 (한겨레21,786호)社會/서울, 경성, 한양 2018. 3. 28. 19:07
돌아온 산, 남산독재정권의 개발 빙자한 학대 중턱에 자유센터·국립극장 등 공공시설물 대거 입주… 명당인 외인아파트·하얏트호텔 등은 외국인 휴식처로 전락제786호등록 : 2009-11-18 15:36 수정 : 2009-11-19 22:40 제3공화국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남산 파괴가 이뤄졌다. 첫 번째 대규모 훼손은 세운상가 개발이었다.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축인 이 지역은 일본인 동네가 들어섰다가 이른바 ‘도시소개대강’(都市疏開大綱)에 따라 철거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어지럽게 버려져 있던 것을 콘크리트 근대화의 표본으로 개발한 것이 그 흉측한 세운상가였다.이 축은 남산의 직접적인 일부는 아닐지라도 북악과 한강을 잇는 풍수지리 축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서울 전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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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다 (한겨레21,789호)社會/서울, 경성, 한양 2018. 3. 28. 19:03
돌아온 산, 남산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되다 5·16 쿠데타 뒤 중앙정보부 입주하며 야당탄압·간첩사건 조작·고문 현장으로… ‘남산 체제’라는 시대의 상징제789호등록 : 2009-12-09 16:23 수정 : 2009-12-10 16:30 완곡어법(婉曲語法)이 있다. 어떤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대신 모호하고 우회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표현법을 말한다. ‘남산’은 중앙정보부(중정)의 완곡어법이었고,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다. 권위주의 시대 중정은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국민은 중정 대신 남산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중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에는 마땅히 정보기관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장면 정권하에서 이후락이 지휘하던 중앙정보위원회(79호실) 정도가 있었지만, 단순한 정보수집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