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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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역사기행-유영호,2014통일신문] 1. 사대문 이름社會/서울, 경성, 한양 2018. 4. 2. 19:10
사대문 이름,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경계’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 서울 성곽길에서 상상하며 느껴보는 우리역사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발 딛고 사는 서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도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난감했다.그러던 중 600년 전 서울의 첫 모습, 즉 서울성곽을 먼저 떠올리며 옛 한양도성을 돌기로 했다. 약 18.6Km에 해당되는 서울 성곽. 바로 이 길을 걸으며 우리의 역사를 찾고 느껴 보기로 했다.하지만 성곽 자체가 나에게 역사를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직접 그 곳을 밟고 지나며 주변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마치 퍼즐조각을 맞춰 나가 듯 지난 우리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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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③ 사대문 안 길 풍경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4. 2. 18:49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흐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고갯길·골목길들 육조대로·운종가 조선시대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길 현대를 도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만약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는 인간의 걸작품이다. 사대문 안 ‘원(原)서울’은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만든 무위(無爲)의 도시 같다. 풍수지리와 도교 사상이 저변에 깔렸다. 도성 앞뒤에 산이 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지형이다. 모든 인공건조물은 구릉과 물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갯길과 골목길이 자연 생성됐다. 서울 지명에 황토마루(세종로 사거리), 구리개(을지로입구), 운현(운현궁), 진고개(충무로), 박석고개(명륜동), 배고개(종로4가), 맹현(삼청동), 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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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⑥ 세종로 사거리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4. 2. 16:14
세종로 사거리는 본래 삼거리, 관악불길 막는 ‘황토마루’ 일제가 뭉개고 태평로 만들어 황토마루서 바라본 사대문 풍광에 정도전이 칭송詩 읊었다는데… 세종로 사거리는 본디 사거리가 아니라 삼거리였다.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 지도를 펼쳐 보면 오늘의 광화문광장인 육조거리와 남대문을 잇는 남북 간 도로는 없었다. 지금의 태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 광화문 지하도 조성 공사를 끝내 깔끔하게 정리된 1966년 10월 29일 세종로 사거리. 서울시는 당시 2억 1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완공했다. 가리비 모양의 지하도 출입구가 오른쪽 기념비전을 압박하는 듯하다. 반대편에서는 시민회관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새문안길과 맞닿은 건물 옥상에 설치된 전광판도 눈길을 끈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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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⑤ 광화문광장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4. 2. 16:11
서울의 심장·국가중심도로… 곳곳에 600여년 역사의 영욕이>>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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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④ 한강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4. 2. 15:59
덮이고 파헤쳐진 개천·나루터·섬들 도도한 큰 물길 상처가 흐른다 ▲ 1972년의 한강(사진 위)과 2012년의 한강(아래). 두 사진 사이에는 40년 세월이 흘렀을 뿐이지만 세 차례의 한강 개발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970년 초 한강에는 강 양쪽에 홍수 대비용 제방이 축조됐고 제방 위에 강변북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여의도와 잠실은 섬에서 뭍으로 변했다. 그러나 강남 쪽 강변에는 여전히 백사장과 모래톱이 남아 있고 강남은 논과 밭이 펼쳐진 목가적인 마을 풍경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2012년 사진 속 한강은 말끔하게 정리됐지만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서울을 한강 이남과 한강 이북으로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본 서울의 변천사:서울시 제공>>청계천:거꾸로 흐르는 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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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4. 2. 14:32
정도전이 세운 길, 일제가 짓밟은 길… 101년 만에 正道 복원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 1962… 중앙청에 가로막힌 경복궁 전차길이 선명한 1962년 세종로. 중앙청이 위용을 과시하며 북악과 경복궁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있으며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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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택리지] ① 프롤로그-변천사社會/서울택리지(2013서울신문) 2018. 3. 26. 13:18
서울은 진화 중우리에게 서울이란 무엇인가. 한강 기슭에 터 잡은 한성백제 이후 2000년의 역사가 어린 한민족의 고향쯤이기도 하고, 북악 아래 도읍을 정한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조선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유린당했지만 정체성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민족정기 말살을 노리는 대못을 구석구석 박았다.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제의 식민 경영에 의해 서울은 심각하게 왜곡됐다.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서울시내 건물의 3분의1이 파괴됐다. 사대문 안 문화재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서울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런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60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인 성장과 변화가 휩쓸고 갔다. 어떻게 가능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