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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김봉환 김좌진 장군 암살의 미스테리人間/강경애 2016. 4. 18. 15:52
김봉환과 김좌진 장군 암살의 미스테리
여기서 가져왔습니다. http://blog.daum.net/savatthi/46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6월 01일 (금) 11:03:46 김남수 북경으로 유학한 6명의 스님 중 마지막 남은 사람이 김봉환이다. 앞서 김사국과 북경으로 유학한 승려들을 살펴보면서 간간히 김봉환에 대한 일들이 거론되었다. 불가피하게 반복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
김봉환은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혹은 사회주의 운동가의 이름보다는 김좌진 장군 암살을 교사한 사람으로 세간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김좌진은 1931년 1월 24일 만주에서 박상실에 의해 살해된다. 암살 직후 교사자로 지목된 김봉환은 검거되어 살해된다. 김봉환 등의 김좌진 암살은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이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둘째는 박상실을 교사한 김봉환은 왜 김좌진을 암살하려 했을까라는 문제이다. 일각에서는 김봉환이 일제에 회유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으며, 또 다른 시각에서는 당시 그 지역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의 알력 다툼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 번째는 김봉환과 내연의 관계였던 여류문인 강경애의 실존 문제이다. 김봉환의 내연녀가 강경애인가 김경애인가, 그리고 강경애라면 여류문인으로 유명한 강경애와 동일 인물인가 등의 문제이다.
우리는 김봉환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이 같은 논란에 대해서도 들여다 볼 예정이다. 김봉환에 대한 기록이, 앞서 글을 연재하면서 많이 의존하였던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정화암과 이강훈의 증언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김봉환에 대한 양자의 시각은 전혀 다른 면모를 갖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살펴볼 예정이다.
범어사 명정학교 졸업한 김봉환
김봉환은 기록에 김봉한(金鳳漢)으로도 표기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인물란에 따르면 김봉환(자료에는 김봉한으로 표기되어 나옴)은 1902년 5월 28일 양산군 동면 금산리에서 김기진(金基鎭)에게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서당에서 학문을 닦았다. 1912년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명정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범어사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얼굴이 긴 편이고 하얀 피부에 중간 정도의 체격으로 표기되었고 성격은 온순한 편이라고 적혀있다.▲ [사진1] 범어사에 설립된 명정학교 전경 1902년생이라 했으니 김봉환이 1912년 졸업하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김봉환이 10살에 명정학교를 졸업한 것이 된다. 의문이 들 수 있는 기록이다. 자료의 착오도 있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명정학교 2회 졸업은 1913년에 있었다. 명정학교 2회 졸업생은 김봉환 이외에 강덕우, 김도원, 김상헌, 김정우, 차상명, 김봉휘가 있다.
역사적 사건에 나오는 김봉환은 3.1운동부터이다. 3.1운동에 동참한 불교계 대표인사는 한용운과 백용성이다. 한용운은 3.1운동 직후부터 중앙학림 학생들과 논의하였던 것으로 알려지며, 김법린과 김상호도 그 중심에 선다. 김법린과 김상호는 범어사 출신 스님이었고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 후 범어사로 내려와 운동을 준비한다. 3월 18일, 19일 범어사 명정학교 재학생들과 지방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김봉환도 참여한다. 김봉환은 만세운동 참여로 1년의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정확히 자료를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김봉환은 1919년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1월 29일에 출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출옥 후 김봉환은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전개한다. 1920년 6월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9월 10일 범어사 지회를 설립하였는데 김봉환은 차상명, 김해관, 지설준과 더불어 포교부원으로 활동한다. 김봉환은 늦어도 1921년경에는 서울로 상경하였으며 안국동 선학원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 1921년 12월 창립된 불교유신회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2월 불교유신회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유신회원들이 각 지방으로 파견되었는데 김봉환은 경의선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 [사진2] 조선불교청년회의 제1회 정기총회 모습 우리가 김사국을 논할 때 잠시 살펴보았는데, 김봉환은 이즈음 사회주의 운동에 결합하게 된다. 1922년 1월 창립된 무산자동지회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즈음 운암 김성숙을 알게 된 듯하다. 김봉환은 김성숙과 조선불교유신회 활동을 함께 하였으며, 무산자동맹회 활동도 함께 하였다.
북경 유학길에 오르다김봉환에 대해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김봉환이 1922년 공산주의자 김한(金翰)의 부하가 되어 무산자동맹회에 들어가고, 청년 승려 중 불량분자를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1922년 7월 제다(齊多, 현재의 러시아 치타)에서 공산당대회가 개최되는 것에 맞춰 무산자동맹회 대표자로서 출석하고자 출발했으나,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 [사진3] 김봉환과 함께 무산자동맹회 활동을 함께한 독립운동가 김한 1922년 7월에 열린 공산당 대회라 하면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머나먼 시베리아의 한 지방 도시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애초에 치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장소를 옮기어 열린 대회이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기록이 또 있는데 정화암의 증언이다. 정화암은 김봉환의 인간됨을 평가하면서 김봉환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 참여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김봉환은) 조선공산당의 대표로 참가했는데 일본 공산당의 대표인 시미즈라는 사람과 같이 같습니다. 모스크바에 가니깐 소련인들이 시미즈를 가리키며 <일본에서 온 저 놈은 스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뿐 아니라 함께 온 김봉환마저 의심하더랍니다. 그래서 김봉환은 <그렇다면 내가 처치를 하겠다>고 다짐한 뒤 시미즈를 산으로 유인해 총으로 쏴 죽여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했다는 겁니다. 이런 강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됨은 대단한 일꾼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라 하면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4차대회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기록을 믿는 다면 김봉환은 1922년 가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참여한 후,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참여하고 이후 북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양 대회 참가자 명단에서 김봉환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김봉환이 그 곳에 간 것은 분명할까? 혹은 대회에 참여한 다른 사람과 함께 수행차원에서 갔을까? 정화암은 김봉환의 기억을 통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김봉환이 1922년 가을에 국내를 떠나 시베리아 쪽으로 갔다는 두 가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봉환이 김성숙 등 5명의 스님들과 함께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혹은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참여한 후 북경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김봉환은 1923년 김성숙 등 5명의 스님과 함께 북경에 있었다. 김봉환은 문화대학(文化大學)에 입학하였으며 이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
북경에서 김봉환은 1923년 10월 28일 창립된 ‘재연경조선불교유학생회(在燕京朝鮮佛敎留學生會)’ 활동을 하였으며, 북경조선유학생회들이 결합하여 1924년 설립된 반역사(反逆社)에 참여한다. “현재의 사회제도에 반역한다”는 의미에서 세운 반역사에 김성숙, 차응준, 김규하 등 다른 승려들과 함께 한다. 1924년 가을에 창립된 혁명사(革命社) 활동을 전개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 [사진4] 아나키스트 정화암 이 시기에 아나키스트로 유명한 정화암을 만난다. 1923년 김봉환이 북경에 도착할 즈음 한인사회에 아나키스트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조류가 있었는데 정화암은 아나키스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화암과 김봉환은 인간적으로 가까웠고 함께 많은 일도 한 사이이다. 김봉환은 유물사관에 관한 책을 탐독하면서 공산주의에 기울었고 유학생들이 주목하였던 사람이고, 정화암과는 사상적인 논쟁도 많이 하였다. 정화암은 아나키즘이 옳다고 하고 김봉환은 공산주의가 옳다고 각기 주장하였다. 김봉환은 공산당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열단 일도 보고 임정일도 거드는 등 활동적이고 능률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김봉환과 함께 활동하였던 김성숙, 장지락 그리고 2명의 승려는 1925년 겨울 광저우로 향한다. 김봉환은 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화암의 회고가 유일한데 김봉환은 1927년 만주 영안현(寧安縣)으로 떠난다. 영안현의 어느 마을에서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으로 고국에서 부임해 온 여교사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봉환은 그 곳에서 운명적인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참고자료>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이성수, 명정학교 설립시기ㆍ위치 확인, <불교신문> 2442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금정중학교 100년 화보집 http://kumjung.ms.kr승려 출신 김봉환의 최후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06월 08일 (금) 11:51:53 김남수 1930년 1월 24일(음력 12월 25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김좌진 장군이 정미소에서 일명 ‘박상실’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김좌진 살해 직후부터 살해자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일원이며 재중한인청년동맹원인 박상실로 지목되었고, 배후자로 김봉환이 거론되었다.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김좌진의 살해자는 최동범, 공도진이라는 필명을 지닌 이복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하였던 이복림은 1929년 만주총국의 책임비서였던 김백파의 특수임무를 받고 한족총연합회의 본부에 잠입하고 김좌진이 경영하는 금성정미소에 위장 취업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복림은 곧바로 도주하여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초기에 살해자로 거론되던 박상실과 이복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데, 박상실을 이복림의 또 다른 필명으로 보면 문제는 해소된다. 그럴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사진1> 사건 직후 살해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이 글의 소재이기도 한 김좌진 살해의 배후자로 지목된 김봉환으로 돌아가 보자. 장례 직후부터 김봉환은 암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고, 살해 후 숨어있던 김봉환은 검거되어 곧 바로 사살된다. 김봉환이 김좌진 살해의 배후자였다면, 이 시기 김봉환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김봉환이 1927년 북경에서 만주로 이전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류 소설가로 유명한 강경애(姜敬愛 1906.4.20~ 1943.4.26.)이다. 독립운동가로 김좌진을 보필하였던 이강훈의 증언으로부터 등장한다.
김좌진을 없애기로 고려공산당에서 정합니다. 김일성(金一星)을 내세웠단 말이지. 지금 북한의 김일성이가 아니고, 본명이 김봉환인 김일성인데 정화암씨가 이 김일성이를 잘 알지요. ···(중략) ··· 강경애라고 하는 여자가 있는데 소설가이지요. 이 여자가 김봉환의 애인입니다. 그런데 강경애도 공산당이고 김봉환도 공산당입니다. 그러한 사이인데, 김봉환이 하얼빈에 나갔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어요. ···(중략) ··· 이놈이 붙잡혀 온 김봉환을 모략정책의 도구로 쓸 계획을 짭니다. 김봉환을 왜경의 스파이로 쓰자는 뱃심인 것입니다. 이때 김경애(金敬愛)가 찾아왔어요.
김봉환의 암살 동기
이강훈의 이 같은 증언에서 김좌진 살해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강훈은 김봉환이 일제에 잡힌 후, 풀리는 대가로 김좌진을 죽이게 되었고 이를 강경애가 일제와 협약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강훈은 위의 증언에서 김봉환의 애인을 처음에는 강경애라고도 했다가, 나중에는 김경애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자연스레 문제가 제기된다. 김봉환이 김좌진 살해를 도모한 것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계략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붙잡힌 김봉환이 일제의 사주를 받아 진행한 것인가? 또 하나는 ‘김봉환의 애인은 강경애인가 김경애인가, 강경애라면 여류 소설가 강경애인가?’라는 문제이다.
정화암은 사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는다. 정화암의 회고를 정리하면, “그 때 공산주의자와 우익 독립운동가들 사이가 아주 나빠 똑같이 항일한다고 하면서도 만주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같은 영안현 안에서도 어느 지역은 공산주의자들의 지역이고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극인 판인데, 공산당은 해림을 근거로 한 김좌진의 한종총련이 공산당의 활동과 사상전파에 많은 지장을 주는데다가 아예 기반마저 굳혀가자 우두머리인 김좌진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2> 금성정미소 현장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강훈의 증언대로라면 김봉환은 1927년 만주로 옮긴 직후 강경애와 동거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풀어나는 대가로 일제의 사주를 받아 살해를 사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진술은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즉, 일제에 체포된 김봉환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당원이었던 박상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주총국으로부터 사건의 실행을 인정받아야 한다. 조선인과 일본인,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던 시절에 일본 경찰에 피랍된 김봉환이 순순히 풀려나왔을 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김봉환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다른 이들도 지적하듯이 이강훈의 진술에서 의심되는 대목이다.
김봉환의 애인, 강경애김봉환의 애인이 여류 소설가 강경애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된 적이 있다. <참고자료>에 있는 리광인이 지적한 대로 김봉환의 애인이 강경애가 아니라 김경애라는 주장이다. 리광인은 글에서 김봉환의 애인을 김경애로 보고 있다. 김성숙 김봉환이 북경에서 활동할 때, 상해 북경과 천진 서울 등을 오가며 활동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조선 여성 김경애를 김봉환의 애인으로 보고 있다. 김경애는 김성숙 김봉환이 발간한 『황야』, 『혁명』 잡지에 필명으로 기고하는 등 김봉환과 북경 시절부터 알던 사이로 추정한다.
이 주장은 설사 김봉환과 김경애가 북경 등지에서 서로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은 입증하지 못한다. 김봉환과 강경애가 애인 관계였다는 사실은 이강훈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고, 김경애라는 이름의 등장도 이강훈이 강경애와 혼동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김봉환을 놓고 볼 때, 김경애는 이강훈이 이름을 혼동하지 않았더라면 등장하지 않았을 인물인 것이다.
<사진3> 김봉환의 연인, 강경애
김봉환의 애인이 강경애가 아니었다는 논거 중의 하나가 ‘강경애가 1920년대 후반에 만주에 있지 않고 국내에 있었다’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적이 있다. 그런데 최학송이 『만주체험과 강경애 문학』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강경애가 1926년에 만주로 갔고 2년여의 시간을 하이린, 닝구타 일대에서 보내고 1928년 겨울에 고향 장연에 돌아와 근우회에 가담하였음’을 세밀히 논증한 것으로 볼 때 이 주장 역시 설득력을 잃었다.
즉, 강경애는 김봉환의 애인이었으며 만주에서 2년 내외를 함께한 것이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머슴 출신의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네 살 적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병약한 어머니는 장연으로 후살이를 들어가게 된다. 열 살이 지나서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장연소학교에 들어갔고 이어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에 독서회와 동맹휴학 주동으로 퇴학을 당한다. 강경애는 1924년 무렵에 장연 태생의 동경유학생이던 양주동을 만나 서울로 올라와서 동거하며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일 년여를 수학했다.
‘금성’지에 강가마(姜珂瑪)라는 필명으로 ‘책 한권’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양주동과 헤어져 언니가 경영하는 장연의 서선여관에서 기거한다. 이듬해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했고 20년대 후반까지 그녀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습작과 독서를 하는 한편 ‘흥풍야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이 시기에 만주로 가서 김봉환을 만났고, 1928년 겨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1929년 강경애는 신간회와 더불어 창립된 여성운동조직 ‘근우회’ 활동을 한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破琴)’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같은 해에 장연 군청서기 출신인 장하일과 결혼하여 간도 용정으로 이주한다. 1934년 <소금>을 ‘신가정’에 발표하고, 같은 해 8월부터 12월까지 그의 대표작이자 식민지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인간 문제>를 연재한다. 1939년 지병으로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1944년 병이 악화되어 한 달 전에 작고한 모친을 부르면서 세상과의 인연을 다한다.
김봉환의 최후이제 김봉환에 대한 글을 정리하도록 하자. 정화암 이강훈의 회고와 최학송의 글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김봉환은 1926년 혹은 1927년, 정화암의 회고대로 유치원 여교사 즉 강경애와 결혼하기 위해서이든 혹은 공산주의 활동을 위해서든 만주로 간다. 만주로 향하여 혁명투사들의 내왕이 빈번한 중동선 해림참(中東線 海林站) 역에 정착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의 북만구역국의 조직부장 김은한과 함께 아성지역에 파견되어 1927년 3월부터 두 달 동안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김봉환 활동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주로 이강훈의 회고에 근거하여, 김봉환이 이 시기에 강경애와 신민부(新民府)의 기관지인 신민보(新民報)에 종종 기고(寄稿)하여 부(府)의 사업을 옆에서 내조하였고, 이들의 투고가 적색(赤色)의 경향을 띠었다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강훈의 증언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리광인은 다른 글에서 이상경 교수의 말을 빌러 ‘신민보(新民報)의 주요 필자는 허성묵, 박두희, 최창익이며 강경애는커녕 김봉환의 이름은 없다’라고 한다. 김봉환이 강경애와 신민보 사업을 하였고, 이를 전후로 일제에 회유되었다는 이강훈의 회고가 중요한 부분에서 또 한 번 의심되고 있다.
김봉환은 1928년 경 박상실 경 김좌진 암살 계획을 세웠으며, 김좌진이 경영하던 정미소의 머슴으로 잠입한 박상실은 1931년 1월 그 계획을 실행한다. 사건 후 박상실은 도망갔으며, 해림의 어느 예배당에 숨어 있던 김봉환은 잡히어 사살된다.
김봉환이 사살된 지 1년 후 만주에 도착한 정화암은 해림에서 산시로 가는 산모퉁이의 바위 옆에서 뒹굴고 있는 김봉환의 해골과 뼈를 수습한다. 시체를 덮었던 거적은 살과 함께 다 썩어서 흔적만 남고, 앙상히 남은 뼈만 나뒹굴고 있었다. 정화암은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이역만리 밖에까지 나와서 동족상쟁을 하느냐!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한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흉하고 한편으로는 죽어 마땅했지만 불쌍한 김봉환의 해골을 땅에 묻어 주었다.
이때가 김봉환이 나이 서른 즈음이다.
<참고자료>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박 환, 김좌진 평전, 선인
최학송, 만주체험과 강경애 문학, 인하대 석사학위논문, 2007년
황석영, 황석영이 뽑은 한국 명단편(8) 강경애의 ‘소금’, <경향신문> 2012.01.13
리광인, 김봉환의 “동거녀”는 강경애 아닌 김경애, 인터넷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