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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환의 “동거녀”는 강경애 아닌 김경애
    人間/강경애 2016. 4. 18. 15:55

    여기서 가져왔습니다.  http://blog.naver.com/dasan11/120113223590



    【론문】

    김봉환의 동거녀 강경애 아닌 김경애

    리광인

     

     

    1. 제기되는 문제

     

    1 강경애 시시비비(2005 . 1—2)  2 강경애 시시비비(2010. 1) 거치면서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는 1930 1 24 김좌진장군 암살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여러모로 보여주었다강경애의 행적연구와 작품,  더우기 수필연구김좌진장군 암살획책자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화요파이고  집행자가 리복림이라는 연구결과가 그러했다이번 새해를 잡아 김송죽소설가가 불을 지핀 2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진실님의 여러 면의 깊이있는 고증을 통해 박상실이 바로리복림이라는 것을 증실하고 김송죽소설가도 받아들인  점은 어찌하든 성과라고 해야겠다.

    이제 남은것은 이른바 박상실을 사주하여 김좌진장군을 암살케 했다는 김봉환이 누구이며 이른바 그의 동거녀라는 강경애 누구인가를 밝히는 작업을 벌리는 것이였다그들이 극력 주장하는 강경애 우리가 말하는 녀류작가 강경애와 전혀 다른  하나의 강경애였다는 것을 사실로 보여 주어야 진정으로 설득력을 가질수가 있었다그러지 않고 우리가 아무리 그들이 말하는 강경애 훗날의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가 아니라해도 그네들은 수긍하려고 하지 않았다.

    할수 없지김봉환과 이른바 강경애 애인관계와 그들의 신분과 래력을 아는대로 밝힐수 밖에그래서 주의한 인물은 김성숙다시 말해 1923 김봉환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나 북경행에 올랐다는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주의자이기도  김성숙연구의 시발점은 김성숙의 행적따라 추적에 놓여진다.

     

    2. 김성숙 북경행 연구

     

    (1) 인터넷 검색이 첫걸음

     

    김성숙 연구자가 아닌데서 김성숙 북경행 연구의 첫걸음은 인터넷 검색부터 시작된다인터넷에서는 김성숙 행적과 생애가 쭈욱 펼쳐지는데 보다 흥취를 자아내는것은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인 김산(장지락) 김성숙이 이만저만이 아니며 아리랑의 노래 김성숙과의 관계북경생홯이 환히 펼쳐진다는 부분이다.

    아리랑의 노래 미국 에드가 스노의  부인인 님윌즈가 1937 초여름 연안에서 중화쏘베트구역에 파련되여 연안에  조선사람 대표이고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학과 물리화학 등을가르칙 있은 김산을 만나고 취재하는 가운데서 산생한작가님의 말그대로 1937 7월이란 특수한 력사시기에 중국 연안이란 중요한 혁명성지에서 중국조선과 세계 인민의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국제성적인 공동한 투쟁속에서 중국 혁명대렬속에 있는 조선인 혁명가 김산과미국 녀작가 님윌즈의 정성어린 합작과 협력에 의해 산생한 혁명문물”(1)이기도 했다.

     

    2 아리랑의 노래백의 동포의 영상

     

    과연 연변력사연구소에서 번역하고 료녕민족출판사에서 1987 2월에 출판한 백의동포의 영상”(2) 펼치니 9—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  부분 금강산의 붉은 승려 전문 김산과 김성숙  김충창의 깊은 관계를 다루고 있었다.

    여러 자료와  “백의 동포의 영상”(아리랑의 노래) 의하면 김성숙(1898~1969) 조선 평안북돟철산군 서림면 강암동 출생이고 1916년에 경기도 룡문사에서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다김산의 회억(3) 따르면 김충창( 김성숙) 열여섯  때에 기독교신자로 되여 열심히 기독교의 교리를공부하였지만  교리에 만족할수가 없어 그해에 집에서 뛰쳐나가 금강산 불승이 되였다고 한다.불교사찰은 유점사(4)라고도 하는데 룡문사와 다른지는 모르고있다.

    1919년에  조선  삼천리강산에 거족적인 위대한 3.1운동이 터져 올랐다 운동에서 김성숙은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5) 치러야 했다형무소에서 풀린후 김성숙은 조선 무산자동맹조선 로공공제회에 가입하여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그러던 1923(김산은 1922년이라고 한다김성숙은 지기들인 5명의 청년 승려들과 더불어 조선을 떠나 북경행에 오르는데  5 승려중의 한사람이 김봉환이였다.

     

    (3) 김봉환 이름의 출현

     

    김봉환의 이름은 김성숙 등의 북경행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전의 래력은 아직 필자가 아는바가 없고안다는것이 고작 통도사 승려라는  뿐이다.

    통도사는 오늘의 겅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 남쪽기슭에 자리잡은 사찰신라 선덕여왕 재위중인 기원 646년에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  자장율사가 세운 사찰로서 해인사,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3 사찰로 불리운다고 한다김봉환은  사찰 승려로서 승려인 지기김성숙 등과 함께 정치활동자유를 찾아 북경행에 오르게 된다적절히 말하면 조선 3.1운동에 참가한후 일제의 검거를 피한 중국으로의 망명이다.

     

    (4) 북경에서의 생활

     

    북경에 망명한후 김성숙은 민족대학(?) 들어가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고 보여지는데김봉황 등에 대해서는 소개가 보여지지 않는다밝혀지는 것은 김성숙김봉환  여섯 사람이문학단체를 조직하고 황야라는 문학잡지를 펴낸 잡지 황야 철학 , 단편소설문예일반으로 꾸려지고 있었는데 김봉환은  잡지의 열성적인 조직자와 기고자의 한사람이였다.

    북경에서 김성숙김봉환 등은 그들보다 2 먼저 북경에 도착한훗날으 중공북평시위 조직부장이고 서기로 활동한 김산을 만나게 되고 동지로 된다김산은 김성숙이를 두고 이렇게 쓰고있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키워준 사람은 김충창이다… 나의 리론적 수양을 지도해  사람이다. 1922년에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나는 열일곱살이였고 그는 스물 일곱살이였다지금도 그는 나의가장 친한 벗이며 동지인  사람가운데의  사람이다.”(6)

     

    이는 김산이 자기의 혁명선배이고 가장 친한 벗인 김성숙에  대한 존경과 고도의 평가를 그대로보여준다.

     

    3창일당과 기관지 혁명잡지

     

    김봉환도 김산과 무척 가까운 사이로 나타난다북경에 자리잡은후 김봉환은 김성숙을 도와 정치단체창일당을 조직하였다김산은 이르꾸쯔크 고려공산당의 한개 지부인 북경 고려공산당을창립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고려공산당은 1921 5월에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서 세운 당인데 상해에 중앙 본부를 두고 중국 국내와 동양 각지에 지부를 두어  영향력이 중국 본토와 만주,  시베리아조선 국내일본 지역에까지 널리 미치였다(7). 북경의 고려공산당은 리동휘당의한개 지부이고 기관지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하였다.

    김산의 소개에 따르면 혁명이란  잡지는 32페지로  잡지로서 창간호로 800부를 찍었다발간 6개월 사이에 3000(8) 고정독자를 가지게 되였는데 조선 국내는 물론 만주시베리아호놀루루캘리포니아유럽  조선류학생들에게까지 발송되고 공산당 동정자좌익민족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그때 김산은  격월간 학생잡지의 3 편집자 가운데의 한사람이고김봉환은 김성숙 김성숙장건상량명김산리낙구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북경생활 기간에 김성숙김봉환김규하 셋은 고려공산당 당원으로 사회주의자가 되고 나머지동행자  승려는 혁명이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면서 조선의 금강산으로 되돌아 버렸다고 한다김산의 회고이다그만큼 김봉환은 열렬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서 황야잡지와 혁명잡지의 조직자기고자 중의 한사람이였다.

    획기적인 것은 김산 등이 북경에서 수명의 가장 초기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을 만난 것인데 그중의대표적인 한분은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의 한사람이고 위대한 공산주의자인 리대소를 만난 (9),김산은 리대소가 그들이 꾸리는 잡지 혁명에다 여러  기고하면서 종종 조언과 비판도 보내며면려해 주었다고 말한다.

     

    4김경애의 등장

     

    김성숙김봉환 등은 고려공산당 북경지부의 활동에 혼신의 정열을 다한다이러한  1924년과1925년에 상해를 근거지로 하고북경과 천진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김경애라는 조선녀성도 들어있다.

    한국 이상경교수의 연구자료—“상해 일본총령사가 자기네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사찰자료 의하면 1924년에 상해 동방예술학교 재학 중인 김경애라는 녀성이 있다.(10)  녀성은 조선 황해도 출신이고고려공산당  당원으로서 녀자 선전부원으로 상해북경천진서울 등지로 다니며활발한 활동을 벌린다.

    한편 김경애는 김성숙 등이 꾸리는 황야”, “혁명이란 잡지에 필명으로 기고하는 열성적인 녀성으로 나타나 북경의 김성숙김봉환 등과도 자주 거래하는 사이로 보인다(11) 그러던  녀성이후에 김봉환을 따라 만주땅에 나타나고 김봉환의 동지로 나타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지들한테 김경애로의 모습을 보인다.

     

    5.  만주행과 강경애로의 오해

     

    1925 겨울에 김성숙 등은 남하하여 광동 광주로 가고김봉환김경애 등은 조직의 지시로 북상하여  동북으로 지대를 옮기게 된다김봉환 등의 동북행이 언제이고어떻게 움직이였는가 하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동북에 이른후 김봉환은 신생한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계의 주요구성원으로 활동하며 동행한 김경애와 동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기의 기록도 보여지는것이 없다문제는 김봉환  한패 고려공산당 출신들 북경에서 동북으로의 북상이다이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설립과 관계된다잠깐 조선공산당 초창기를 돌이켜 보기로 하자

     

    (1)  조선공산당과 만주총국의 설립

     

    지난 20세기20년대 조선국내에서는 건당사업이 자못 활기를 띤다. 그 선두에서 달리는것은 화요회라 하겠다.

    화요회는 1921년 2월에 러시아 10월사회주의혁명의 사상을 가장 일찍 접수한 재일류학생들이 세운 《사상소조》로부터 시작된다. 이 사상소조의 이름은 《화요회》로 통하였다. 사상소조의 조직일이 바로 화요일인데다가 맑스의 탄생일—1818년 5월 5일이 화요일이여서 바람직한 이름이였다. 이들 화요회는 1922년에 조선에 돌아와 본격적인 동지획득에 나서는데 강달영 등이 화요회에 망라된다.

    화요회에 이어 두각을 나타내는것은 1922년 11월에 조직된 북풍회이다. 이들은 1923년 8월에 조선에 돌아와서 활동을 벌리다가 1924년에 《북풍회》로 결성된다. 그 시기 나타난 《무산자동맹회》는 화요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단체라면 조선로동당은 울라지보스또크와 련계를 가지는 이르꾸쯔크파 계렬이다.

    이르꾸쯔크파인 김재봉의 적극적인 창도로 하여 상기 화요회와 북풍회, 무산자동맹회, 조선로동당의 대표들은 1925년 4월 17일에 서울 황금거리 1번지인 중국인판점 아서원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통일당—조선공산당을 구성한다. 이튿날 4월 18일에 통일당집행위원회는 제1차회의를 가지고 김재봉을 위원장(즉 제1임 책임비서)으로 하는 중앙지도기구를 내오고 해외부, 만주총국, 일본부를 설치할 결의를 짓고 조선공산당의 정식탄생을 선고한다. 같은날 4월 18일에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고 박헌영을 제1서기로, 권오를 제2서기로 내세운다. 미구하여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국제공산당의 한개 지부로 력사에 등장한다.

    조선공산당은 창립된후 빠른 시일내에 290개 기층조직을 가진 공산당으로 발돋움한다. 중앙으로부터 도, 군에 이르는 지휘계통이 구전히 갖추어진셈이다. 1926년 4월 6일에 조선공산당 제2차 당 책임비서 강달영은 상해에 가있는 김찬에게 조속히 만주총국을 조직하라는 지령을 내리였다. 강달영의 지령에 좇아 김찬은 이해 5월 16일에 조진암과 최원택, 김재명과 함께 흑룡강성 주하현 일면파 김철훈의 집에서 조직회의를 가지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창립을 선고한다. 조봉암(화요파)이 책임비서를 맡고 조선공산당 제1차당의 위원인 최원택(화요파)이 조직부장을, 윤자영(상해파)이 선전부장을 맡았다. 신생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총부를 녕고탑에 설치하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구역국을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시기의 만주총국간부구성을 보면 김하구, 윤자영이 상해파인외 모두가 화요파계렬로 되였다. 이는 만주총국의 사실상 령도권이 화요파의 수중에 집중되였음을 알려준다. 화요파계렬의 만주총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부장 최원택의 피로한 만주총국 시초의 조직구성도 그러하다.  이는 또 측면으로 김봉환 등이 왜 북경을 떠나 동북으로 왔고, 어찌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화요파 계렬로 활동하게 되였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다.

     

    (2) 김봉환, 김경애로 돌아 와서

     

    192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설립과 화요파의 활동은 동북에서의 김봉환 등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조공당 만주총국의 관련자료와 조공당 만주총국이나  북만, 동만, 남만 3개구역국 조직체계를 보면 김봉환의 이름을 찾아 볼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김경애에 대해, 김봉환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지는 그 무엇이 없다. 김봉환, 이른바 강경애 즉 김경애를 반역자로 몰아가는 이강훈, 이을규의 글들만이 보일 뿐이다.

    그럼 이강훈은 김경애를 어떻게 언급했는가? 1969년에 한국 이강훈 옹은 이정식교수와 면담할 때 “강경애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바로 김봉환의 애인입니다. 그런데 김경애도 공산당이고 김봉환도 공산당입니다…그러한 사이인데요.”라는 말을 남긴다. 하긴 김봉환, 김경애 둘다 북경, 상해 시절에 고려공산당 당원이고, 동북에서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니 공산당이라고 찍은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단지, 이강훈 옹의 이 말에서 문제로 나서는 것은 강경애요, 김경애요의 헛갈림으로 회고한 것인데 지금보면 이강훈 옹이 그때 그시절 김경애라는 인상이 박힌데서 우연중 필연으로 뒤섞을 수밖에 없었다.

    김봉환의 동지로 나타난 녀성은 김경애이다. 이런 김경애녀성을 이강훈 옹이나 이을규 등 회고록은 훗날 30년대와 40년대 초반까지 룡정에서 꽤나 오래 생활한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로 보고 혼돈하며 룡정시절의 강경애로 못박으며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의 공범으로 몰아가니 물의를 빚지 않을수가 없었다. 어찌해도 김경애가 조공당원이고 20대 성숙한 녀자로 활동할 때 황해도 장연 강경애는 문학공부를 하는 한낱 “문학소녀”였으니 어떻게 해도 북만시절의 김경애와 이어질수가 없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도 몰랐다. 또, 강경애로 말하면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은 전혀 련계되지 않는 별개의 문제였다.

     

    6나오는 

     

    김봉환과 그의 동지 김경애 행적연구로부터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의 공범으로 몰린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는 완전히 해방을 받게 되였다. 두차례 뜻하지 않은 강경애 시시비비, 더우기 두번째 시시비비에서 리복림이 박상실이라는것이 알려지고 증실되면서 남은것은 시시비비의 근본줄거리인 강경애가 강경애가 김좌진암살사건의 교사범, 즉 공범이 옳으냐 아니냐는 문제였다.

    이 근본시비를 두고 필자는 두차례 강경애 시시비비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는바 두번째 시시비비에서 독립운동가이고 사회주의자였던 한국의 김성숙 등 북경행 행적연구와 이 행적에서의 김봉환연구를 통하여 김봉환과 황해도 출신이고 중국 상해 등지에서 활동한 조선녀성 김경애를 통하여 김경애가 동북 조공당 시절의 김봉환의 동지와 동행자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서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사건과 전혀 무관함을 보여 주었다.

    김경애란 김봉환의 동지 추적에서 한국의 이상경교수와 항일로선배 량환준선생의 지난 세기 80년대 초 귀뜸과 얘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였다. 필자가 지난 80년대 초 연변대 재학시절에 량환준선생은 김봉환과 김경애에 대해 언녕 일깨워주며 이들 두 사람이 모두 직업혁명가들이였다고 지적한바 있다.

    한국 이상경교수께 감사를 드리고 구천에 계신 량환준 항일로선배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번 제2차 강경애 시시비비를 일으킨 우리 소설가 김송죽선생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김송죽선생의 출현이 아니면 김봉환, 김경애 행적연구가 없었을 것이고 강경애를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의 공범에서 철저히, 깨끗히 해탈시키는데 계속 장애에 부딪치게 될 것이였다. 아직도 김경애를 김경애로 보며 모독을 일삼던 사람들이 그들 립장과 견해를 완전히 돌리기에는 시간과 거리가 있겠으나 강경애를 계속 꼬집기에는 한계를 느낄것이다.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여, 구천에서 환히 웃으시라, 그대는 불운의 이른바 반역자, 공범의 모독에서 완전히  해탈되였도다 !!!

    주해:

    (1) “백의동포의 영상”, 료녕민족출판사, 1987 2,  506페지

    (2본서는 미국 녀작가 님윌즈과 조선인 김산의 공저 아리랑의 노래”(조선인 2. 혁명가의 생애)(일본문) 중역한 것이다.

    (3)  “백의동포의 영상”, 164페지

    (4) 유점사신금강에 있다고 한다신라 중세기에 세워진 사찰이다일본문 역자의 주해인데 번역상 오차가 있는것 같다.

    (5)  김산은 일본측에 체포되여 1년간 투옥되여 있었다고 한다.

    (6)  “백의동포의 영상”,  164페지

    (7)  리광인겨레 항일지사들(3), 리동휘부분민족출판사, 2007 10 17페지

    (8)  “백의동포의 영상”,  166페지

    (9)  “백의동포의 영상”,  167페지

    (10) “상해 재주선인류학생 상황에 대한 기밀 37, “불령단 관계 잡건선인의 상해 지방 5”(1924 2 19)

    (11) 항일 로선배 량환준의 회고

     

    2010 2 7강남땅 두앵원에서

     

    http://yanbian.moyiza.com/?mid=bbs&category=193142&document_srl=19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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