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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공간 김동인 미발굴 자료2 (김태완기자2012.5.월간조선)
    人間/문학사의풍경 2018. 3. 28. 23:22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②

    오로지 ‘욕설’로 이름 석 자를 알린 좌익 문사들



    ⊙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이 ‘욕설의 축적’ 출세의 기반 삼아
    ⊙ 1945년 美군정 간부가 불하한 적산가옥에 살던 김동인, 1년 만에 쫓겨나
      ‘욕설’과 ‘일인가옥’(日人家屋)은 광복 이후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생활과 심리상태가 잘 드러난 글이다. 좌우 극심한 혼란기 ‘군돈’ 같은 원고료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시기다.
      
      ‘욕설’은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일인가옥’은 같은 해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6차례 걸쳐 실렸다. ‘입에 풀칠을 위한 글쓰기’, ‘호구(糊口)의 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쓰던 시절이었다. 날마다 글을 써야 했으나 그래도 의식은 살아 번득였다.
      
      사실 김동인은 신문사와 인연이 깊다. 봉급생활을 40일간 한 적이 있다. 바로 《조선일보》(1934년 4월 입사)에서다. 당시 사장은 조만식(曺晩植·1883~1950), 편집국장은 시인 주요한(朱耀翰·1900~1979)이었다. 김동인은 40일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있으며 문학청년 이기영(李箕永·1895~1984)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기영은 소설 <고향>, <쥐불(鼠火)>로 유명한 북한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당시 이기영은 소위 ‘살인·방화 소설’ 문사로 중앙 문단에서는 제외돼 있던 작가였다고 한다.
      
      
      욕설로 이름 알리기
      
      우익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시대 좌익 작가들 역시 생활이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기성 작가들에 비해 기법이나 필력 면에서 뒤떨어져 전업하지 않으면 굶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좌익계열의 한 맹장이던 백철(白鐵·1908~1985)도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김동인을 찾아와 “이데올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달라”고 하면서 원고뭉치를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김동인은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 값이라도 내어주기 위해 경리직원과 늘 다투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 ‘북조선 문학자동맹위원장’이었다. 그전까지는 프로작가의 틈에서 살인, 방화소설 및 욕설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L씨(소설가 이기영-편집자註)는 이때에 이 <쥐불>로 비로소 중앙에 머리를 내어놓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었고, 이리하여 오늘날의 반석에 도달한 것이다. 욕설이 직접 출세의 실마리가 된 바는 아니지만 오늘의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그 시대 이후의 사람은 제하고)은 욕설의 축적으로서 출세의 모태를 잡은 것만은 사실이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5일)
      
      ‘욕설’은 좌익 문사들의 선동적인 글, 즉 욕설에 가까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좌익 문사들이 이름을 날리고 남보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색채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욕설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붙들어서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쓴다. 그러면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그 욕먹는 자의 이름을 보아서 그 글을 지상에 게재해 준다. 독자도 그 욕먹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니 그 글을 읽는다. 이리하여 자연 몇 번 그런 글이 거듭 펴노라면 ‘욕한 사람’도 차차 이름을 알게 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4일)
      
      좌익 문사들은 “이름을 얻기 위해 공연한 사람을 붙들어서 별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고 김동인은 주장한다. 일제시대 욕설로 등용(登庸)해 이름을 알린 이들의 행태는 8·15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이들은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평양신보》, 《서울신문》 등의 신문에 자리 잡고서 본격적인 욕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동인 선생은 그들을 향해 ‘욕으로 재등용하는 작가 아닌 작가’라고 비판했다. 이런 좌익 인사들의 욕설은 2012년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꼼수’ 출신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의 종교·여성·노인을 향한 욕설과 막말이 그 예다.
      
      <본시부터 애족(愛族)관념이 없던 위에 좌익사상은 구연(舊緣)이 있는 관계로 ― 그들은 해방 조선에서 엉뚱한 출발을 한 것이었다. ‘애국’이라 하면 일본이고 소련이고 조선이고를 매 한 가지로 어느 것에 매번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관인 듯싶다. 그리고 무슨 가죽을 얼굴에 쓴 그런 말이 나오는지…(중략)…욕설이나 선동은 그들이 오래 수련한 바의 재주다.…(중략)…그들과 동반하여 나아가는 ××당(黨)도 똑같은 코스를 밟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7일)
      
      
      집을 잃다!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이 거주하던 적산가옥. 최근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 변신한 경북 울릉군 도동리의 한 일본식 가옥 전경./울릉군 제공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한국의 주택사정은 커다란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70여만 명에 달하던 일본인이 돌아갔으나 일본·만주·중국에 살던 동포들이 대거 귀국한 것이다. 그 수가 120만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다 공산체제를 피해 남하한 이북 사람까지 몰려들어 주택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돌아가면서 귀속재산이 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약 5만 채가량 있었으나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일인가옥은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집값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거저 버리고 도망치던 집이 시가의 약 1할(割), 2, 3, 4, 5할로 쑥쑥 올라갔다. 조선 사람이 사주지 않으면 그냥 버리고 갈 집이지만…(중략)…내버려두면 조선의 국부(國富)가 될 돈을 경쟁적으로 자기네(일인)까지 갖다 바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5일)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를 발표하며 모든 적산(敵産)을 군정하에 귀속시켰다. 그 무렵, 김동인 역시 적산가옥에 살고 있었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 광공국(鑛工局) 부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던 것이다. 그 집은 기역자(字) 구조로, 글 쓰는 작업실이 부엌이나 방들과 떨어져 좋았다고 한다. 또 일본식 정원이 마당에 있어 작품 활동에 지친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해방 후 다시 서울로 오니 이 육척을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집을 하나 구해보려고 쩔쩔맬 때에 그때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이던 모씨가 그 소문을 듣고 내게 집 한 채를 알선해 주었다.
      
      “그대가 조선어와 조선문학의 길을 지키노라고 고절(苦節) 30년 조선 국가가 있으면 국가로서 마땅히 표창할 일이지만, 그건 현재 할 수 없고 집 한 칸도 없이 지금 공중에 뜬 형편이라니 역시 불안할 수 없다. 현재 군정청에서 일본인 큰 회사를 접수하여 그 사택이 백여 채가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한 채 골라잡으라. 무론 나 개인으로 하는 일이요,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로다.”
      
      이리하여 어떤 일본 회사 사장의 사택이었던 집을 한 채 빌리고 이제 마음 놓고 내 가족을 데리고 살아오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9일)
      
      김동인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저 얻은 집이지만 장차는 조선 정부가 생겨서 살라 할 때에는 살 것으로 알고 마음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집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청의 일방적인 조치로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1946년 11월 불하받은 가옥이 군정청에 접수돼 부득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 김동인은 《속망국인기》(續亡國人期)(1948)에다 이렇게 회고했다.
      
      <일제시절에는 그래도 서로 말, 언어가 통해야 이쪽 의사를 저쪽에 알릴 수 있고 저쪽 의사를 이쪽이 알 수 있었으니 서로 오해는 없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다만 저들의 눈에는 우리는 미개인(未開人)일 따름이요, 우리의 눈에는 저들은 다만 군인일 따름이오.>(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8·15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좌익 측의 찬탁대회.
      김동인은 ‘일인가옥’을 통해 작심하듯 이렇게 말한다.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요컨대 실패의 정치’라고. 또 ‘강권겁탈(强權劫奪)’이란 표현도 썼다. 그 호소는 너무나 절절하다.
      
      <지금 이 집을 잃으면 우리 집 몇 식구는 사실 공중에 뜬 살림이 된다. 이즈음 그 문제로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근심에 쌓여 있다. 나뿐 아니라 다 그러하리라. 늙어가는 몸이 일생을 오직 문학과 국어 사수에 바치고 그 노력을 천하가 모르는 가운데 그래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집 한 채 얻어 잡고 늙마에 몸 의지할 데가 생겼다고 안심하고 있었더니 권력자의 ××는 이 늙은이의 집 한 채조차 용인하지 않아 가족 데리고 한길로 나가라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31일)
      
      동인은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동인의 사정과 호소를 다 들은 뒤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쉰 뒤에 이렇게 말했다. 《속망국인기》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일껏 김 선생의 편의를 보아 드렸었지만, 군에서 쓴다면 할 수 없지요. 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어서 이사 갈 집이나 물색하세요.”
      
      김동인은 더 이상 그에게 불평이나 희망을 말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나는 O씨에게 더 무슨 요구나 희망이나 불평을 말하지 아니하였소. 한댓자 쓸데없을뿐더러, O씨를 괴롭게 하는데 지나지 못할 것이므로.
      
      1945년 8월 15일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다만 ‘망국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할 뿐이오.> (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미발굴 자료


    8·15로 세상이 바뀌었기에 알았지 그런 세상이 더 계속되었다가는 그들의 붓글이 조선 민족을 씨도 없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행(天幸)으로 그런 기사(記事)에는 필자(筆者)의 이름을 쓰지 않았기에 말이지 신문 기사에 책임 필자의 이름을 썼다 하면 그(일본 충신)들은 당장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매 맞아 죽었을 것이다

    ⊙ ‘야비의 문자’가 조선에 나타난 것은 좌익 문사 지망자들의 욕설 유행이 실마리
    ⊙ 공격의 목표가 주로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진영의 지도자
    ⊙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실패의 정치
    ⊙ 약자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원한만은 강자의 권력으로도 말살하지 못해

    [편집자註]
    김동인 선생은 ‘시사평론’이란 어깨제목을 단 ‘욕설’을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게재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신문에 ‘시사문제’란 어깨제목으로 ‘일인가옥’(日人家屋)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실었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저장하는 바람에 원문 상태가 나빠 해독이 어려운 부분은 ‘□’로 표기했다. 또 문장 속에 ‘×’가 들어간 부분이 많은데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는 행을 바꾸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원문을 중시하되 맞춤법이 틀리거나 옛날식 표현, 일본인 한자이름 등은 현대적 표기로 바로잡았다.
      <‘욕설’>
      
      (1)
      
       우리 국가 해방의 공로자인 김구(金九) 선생이 이즈음, “욕설이 너무 유행한다. 야비한 욕설로 지도자를 공격하는 등의 일이 너무 유행한다. 삼가야 할 것이다” 하여 일부 언론기관, 혹은 일부 단체의 야비한 언사를 책망한 일이 있다. 그와 전후하여 이승만 박사도 비슷한 주의를 하였다. 어떤 청년회에서도 유사(類似)한 경고를 하였다.
      
      어떤 신문을 통하여 어떤 정당에서 어떤 선언 ―혹은 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야비하고 무지하였었기 때문에 발단된 문제요, 공격의 목표가 주(主)로 우익 진영의 수령들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며, 김구 주석이며 우익 진영의 지도자들은 그 새 연해 좌익 진영의 공격을 받아오던 터이요, 웬만한 욕설이나 공격에는 면역이 되었을 것이요, 설사 불감(不感)의 지경까지는 아니 이르렀다 할지라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자라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일일이 관심치 아니하던 그이(이 박사며 김 주석)들이었거늘, 이들의 공격에 비로소 꾸중을 하고 일반의 주의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런 것은 도를 넘친 야비(野卑)였던 모양이다.
      
      불행히 나는 그 글이 실렸다는 ××보(報)의 그날 것을 보지를 못하여서 무슨 소리를 썼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상대되지 않는 상대를 상대하여 꾸중하였으니만치 야비의 도가 과하였던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근원지가 예(例)의 ××당(黨)이요, 게재되었다는 기관이 예의 ××보이며 야비, 무지, 몰상식의 도수(度數)는 미루어 알 수 있다.
      
      × × × × ×
      
      대체 이 땅에서 언론기관으로서 인신공격 내지 욕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경부터로서 1921년, 22년에서 차차 번성하여 가서 1926, 27년경이 그 전성기였다.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소위 문화정책의 덕택으로 신문이며 잡지기관, 언론기관이 연해 생겨났다. 신문 잡지가 생겨나자 자연 거기 전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로 손쉽게 ‘문화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문사’가 되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게다가 문사라는 것에는 면허증이 필요 없고 졸업증서라는 것이 쓸 데 없다.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역량과 수완으로 문사가 되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2일) 
      
      
      (2)
      
      1919년의 만세사건 직후의 의기충천하고 기고만장한 이 민족은 제각기 문화인으로 출세해 보려고 움직이었다. 은행 사무원은 주판을 내던지고 시(詩)를 쓰고 회사원은 ‘벤또 곽(도시락-편집자註)’을 동댕이치고 소설을 쓰고, 2000만 모두가 개명(開明)하려고, 개명하기에 첩경인 ‘문사’가 되려고 했었다.
      
      형편이 이렇게 됨에, 하도 지망자가 많은지라 문사 되기도 차차 어려워갔다. 더욱이 등록의 길목은 좁은데다가 모두가 그리로만 모이니 문사로 나서기도 좀체의 일이 아니었다.
      
      × × × × ×
      
      게다가 공산주의가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수입되자 초창기의 조선 공산주의는 사상으로서보다 좌익문학으로 자리 잡으려 하였다. 주종건(朱鍾健) 군 같은 조선 공산당의 원로도 처음은 문사 ― 혹은 거기 유사한 길에서 출발하려 하였다. 이때에 문사, 혹은 문사 지망자들이 좌경(左傾)하였다. 문화인이 되려고 그 첩경인 문사가 되려 하였지만 등용의 길목은 벌써 좁아 갈팡질팡하던 문사 지망자들은 다만 자기의 문학적 ‘역량’이 우수해야만 문사로 뭇 경쟁자를 떨구고 입신할 수가 있었는데 ‘역량’이라는 것은 찬품(饌品·책이나 문서 따위를 저술하고 편집함-편집자註)이라 뜻대로 되지 않고, 다만 멀리서 번쩍이는 문단에 마음만 보내고 있던 중인데 역량 부족만 한탄하고 있었는데,
      
      “좌익문학은 기교가 필요치 않다. 교단 위는 부르주아적 유(類)의 물로서 좌익인은 그런 것을 닳도록 유유한한(悠悠閑閑)하지 못하다. 기교 따위는 무시하라”는 천래(天來)에 가까운 소식이 들어가 역량부족으로 침만 흘리고 있던 문사 지망가들은 모두 일제히 좌경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좌익 문사의 수효는 놀라운 숫자를 보이는 시대가 나타났다. 그들의 작품(소설)은 워낙 실력 없이 뛰쳐나온 바이라 천편일률의 ‘살인 방화’를 주제로 삼은, 그리고 부르주아를 욕하고 프롤레타리아 만세로서 종막(終幕)을 맺는 공식작품이었다.
      
      따라서 갑(甲)의 작품이나 을(乙)의 작품이나 단지 각자의 이름이 다르고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똑같은 것들이었다.
      
      이름 ― 명성을 훤하게 떨치고자 또는 천추에 남기고자 출발하는 그들이었지만, 작품이란 것에 모두 갑의 것이나 을의 것이나 비슷한 것이고 보니 독자 대중도 그런 따위의 작가의 이름은 기억에도 남지 않고 출판사(신문, 잡지, 단행본 등)들도 모두 색채 다른 글을 쓰는 작가를 선택하게 되어 갔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3일)
      
      
      (3)
      
    민촌 이기영.
      그런 종류의 작가 자신들도 자신을 남보다 좀 빨리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색채 다른 글을 써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작품력으로는 워낙 힘이 부족함을 어찌하랴.
      
      × × × × × 
      
      이리하여 이 타개책으로 안출(案出)해 본 것이 ‘욕설’이었다.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붙들어서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쓴다. 그러면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그 욕먹는 자의 이름을 보아서 그 글을 지상에 게재해 준다.
      
      독자도 그 욕먹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니 그 글을 읽는다. 이리하여 자연 몇 번 그런 글이 거듭 펴노라면 ‘욕한 사람’도 차차 이름을 알게 된다.
      
      자기가 이름을 얻기 위해서 공연한 사람을 붙들어서 별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
      
      현재 좌익계들의 제1등의 작가 가운데 남을 욕함으로써 출세의 설 자리를 잡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지금도 작품을 낳으라면 한 편도 못 낳을 작가 ― 즉, 욕설로 등용(登庸)을 하고 길을 터놓은 뒤에는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해방 이후에 와서 ‘욕’으로 재등용하는 작가 아닌 작가들. 
      
      × × × × ×
      
      지금 이런 글을 쓰는 나도 적지 않은 욕을 먹은 사람이다. 이 나를 욕하여 그것으로써 이름을 차차 얻어서 이름 있는 작가가 된 사람도 몇 있다.
      
      조선일보가 안재홍씨 손을 떠나서 한동안 휴간 상태에 빠졌다가 방응모(方應謨)씨의 손으로 다시 속간될 때에 나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의 일을 맡아 본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일이다.
      
      어떤 날, 이젠 고인이 된 문일평(文一平)씨가 내게 어떤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누군가 소설을 한 편 썼는데 그걸 김 선생이 보시고 정중하게 조선일보에 게재하도록 해주시고 그리고 그 사람의 생활이 이즈음 매우 곤란한데 원고료를 좀 주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응락하였다. 내가 조선일보 학예부를 맡아 보는 동안은 결코 과거의 조선의 신문들같이 문사에게 인색한 신문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던 터이라 좋은 작품만 가져오도록 문일평씨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문씨 말은 그(원고의 주인) 어떤 잡지에서 나(東仁)를 몹시 욕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아울러 문씨를 통하여 사죄한다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4일)
      
      
      (4)
      
       그래서 나는 문씨에게 “그 사람의 주의 주장상 나를 욕했다면 지금 몇 푼의 원고료를 얻기 위하여 전사(前事)를 사죄한다는 것은 너무도 경박한 일이며 나는 누가 나를 욕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으며 지금의 원고 문제와 전일(前日)의 욕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것이니 작품만 우수하면 내 힘껏 주선해 보마”라고 약속하니 2, 3일째에 문씨는 한 개 중편소설의 원고를 가져왔다. <쥐불(鼠火)>이라는 작품이었다. 제법 우수하였다. 그래서 조선일보사에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내용의 표현이 유치한 몇 개소(個所)에 가필(加筆)을 하여 발표하였다.
      
      지금 ‘북조선 문학자동맹위원장’이었다. 그전까지는 프로작가의 틈에서 살인, 방화소설 및 욕설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L씨(소설가 李箕永―편집자註)는 이때에 이 <쥐불>로 비로소 중앙에 머리를 내어놓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었고, 이리하여 오늘날의 반석에 도달한 것이다.
      
      욕설이 직접 출세의 실마리가 된 바는 아니지만 오늘의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그 시대 이후의 사람은 제하고)은 욕설의 축적으로서 출세의 모태를 잡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 × × × ×
      
      좌익에도 사상계통과 문학계통이 차차 완연히 갈라서게 되면서 일본은 국가 형세가 차차 비상시국으로 들어가서 국책으로서 좌익(사상이든, 문학이든)에 대하여 무거운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좌익은 모두 지하(地下)로 숨어버렸다.
      
      이 탄압에 사상 계몽의 좌익인은 전향하든가 지하로 잠기든가 하였다. 출세하기 위하여 문사가 되었던 좌익인(사상이나 주의는 좌도 아니요 우도 아님으로써 다만 지명인을 함으로써 출세의 사다리로 삼았던)들은 새 길을 안출(案出)해 내서 자기네들의 이름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직면하였다. 작품을 제작하자니 제작할 역량(力量)이 모자라고, 배운 재간이 글밖에 없으니 새 직업으로 전향할 수도 없고, 일본의 국책상 출판물은 대량으로 감소되었고 ― 여기서 그들이 불붙은 길이 ‘일본 제국에의 협력과 황민화운동’이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5일)
      
      
      (5)
      
    192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 지금은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본시부터 국가관념은 박약하던 그들이었다. 게다가 출세를 하기 위하여 좌익인 노릇을 하는 동안 더 한층 공산주의의 ‘국가관념 무시’에 멱 감고 났는지라, 민족관념은 그들에게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국가라는 것은 봉건주의 사상 아래에서 건설된 묵은 관념의 사상이라, 진보적 공기를 호흡하는 현대인으로서는 배척할 바이다. 사람의 세상에는 다만 계급문제가 있을 따름이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라, 조선이라는 조국이 그들의 머리에 있을 까닭이 없고 민족이라는 주의가 있을 까닭이 없다.
      
      배운 글재주로 신문 잡지 등 기관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은 일본이 전쟁하는 동안은 다만 현상을 유지하는 데 목표를 삼고 이미 배운 글재주나 그동안 연습하였다.
      
      징용에 ― 징병에 ― 그들은 얼마나 외쳤던고. 작품 제작의 역량은 없지만 선동적 문장은 그새(욕하느라고) 익혀두었던 바이다. 이 문장의 힘의 최대한도를 이용하여 조선 대중에게 일본 황민 되기를 부르짖은 것이다.
      
      지금에 말이지 그때를 돌아보면 혹은 일정(日政) 당국에서 여사(如斯)한 선동 혹은 선전을 하라고 명령하면 부득이 피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신문 잡지는 어쩌면 그다지도 건성으로서 조선 민족에게 외치고 부르짖었던고.
      
      위 ‘학병(學兵)’의 최후 마감기일이 임박했을 때와 같은 때에는 아들 가진 조선 사람으로는 결심을 해서라도 지원(志願)치 않을 수 없도록 명령적이요 강제적이요 위압적 문자가 나날이 신문지상에 뛰놀았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도피(逃避)하려다가 신문의 위협에 못 이기어 아들을 내놓고 나중에는 남방에서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중노인(中老人)의 울음 섞인 하소연을 나는 직접 들은 일이 있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당시의 신문 잡지가 일본의 정책에 협력해서 우리 민족을 희생한 그 수효가 사실 큰 바 있다. 그런 선동적 글을 쓴 사람들은 과거에 저명인을 욕하기 위하여 닦아두었던 필봉을 아낌없이 구사한 것이었다.
      
      요행 작년 8월 보름날로 세상이 바뀌었기에 알았지 그런 세상이 더 계속되었다가는 그들의 붓글은 조선 민족을 씨도 없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행(天幸)으로 그런 기사(記事)에는 필자(筆者)의 이름을 쓰지 않았기에 말이지 신문 기사에 책임 필자의 이름을 썼다 하면 그(일본 충신)들은 당장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매 맞아 죽었을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6일)
      
      
      (6)
      조선 민족을 일본 황민으로 만들고 황군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하던 그들(옛날의 문사 지망자)은 8·15의 변동이 있은 뒤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패잔한 일본군을 그토록 돕고자 하던 그들이기에 8·15 이후 조국 일본으로 건너갔나 하면 그렇지 않아, 경우에 따라서는 개가(改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이요, 배운 재간이 글쓰기밖에 없는지라, 8·15 이후 해방 조선에 신문 잡지가 무더기로 쏟아지자, 그들도 경험자·기술가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인민(《朝鮮人民報》―편집자註), 자유(《自由新聞》―편집자註), 평양(《平壤新報》―편집자註), 서울(《서울신문》―편집자註) 등의 신문에 자리 잡고 여전히 글 장사 노릇을 하고 있다.
      
      본시부터 애족(愛族)관념이 없던 위에 좌익사상은 구연(舊緣)이 있는 관계로 ― 그들은 해방 조선에서 엉뚱한 출발을 한 것이었다. ‘애국’이라 하면 일본이고 소련이고 조선이고를 매 한 가지로 어느 것에 매번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관인 듯싶다. 그리고 무슨 가죽을 얼굴에 쓴 그런 말이 나오는지 그들 편에서 도리어 ‘민족반역자’라는 규범을 지어놓고 그 민족반역자의 숙청을 부르짖는다. 욕설이나 선동은 그들이 오래 수련한 바의 재주다.
      
      몇 개의 언론기관을 자기네 손으로 잡고 있다. 예전에는 ‘저명인’을 욕하기 위하여 갈았던 필봉 그 뒤는 삼천만 민족을 일본 충신 되게 하기 위하여 더욱 수련한 필봉을 지금은 또한 지금의 방향으로 돌린 것이다. 그들과 동반하여 나아가는 ××당(黨·조선공산당을 의미-편집자註)도 똑같은 코스를 밟는 것이다.
      
      그들은 흔히 상대방을 ‘민족반역자’라 부르며 공격한다. 더욱이 이승만 박사며 김구 주석에게 그 칭호를 씌우고 공격하며, 더구나 이번에는 국의 방북을 제의하였다 한다. 힘을 꺾을밖에는 도리가 없다.
      
      일찍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에 자리 잡고 앉아 3천만에게 향하여 공출을 엄명하고 징용을 강제하고 징병을 강요하여 적지 않은 유위(幼爲)한 청소년을 죽음의 길로 보낼 당시(작년 8·15 직전)의 기자명부를 찾아내어 오늘날 소위 진보적이라 하는 몇몇 신문의 기자명부와 대조하면(창씨개명은 여럿 있을 것이다) 동일인이 많다는 증거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그들에게 추호만치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언감생심 우리 민족의 앞에 백주에 그 얼굴 내놓고 돌아다니며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 ‘민족반역자’ 운운의 말이 나올까.
      
      누구누구를 “이 땅에서 추방하자” 운운한다니 그런 주장을 제의할 권한이 그들에게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야말로 38 이남의 이 땅에서는 마땅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7일)
      
      
      (7)
      
      더욱이 이 박사와 김 주석을 추방?
      
      한 옛날 조국 광복에 몸을 던진 이래 영영구구(永永無窮·영원하여 끝없이 길고 오램―편집자註) 오직 □ 길이 있음을 모르고 오늘까지 이른 두 노인은 근대적 호흡에 불우하고 유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들의 고집불통이 있었기에 카이로, 포츠담 등에서는 이집트, 필리핀보다도 먼저 한국 독립문제가 등장된 것이다. 그들의 공적을 보아선들, 그들의 노력을 보아선들, 이런 소리가 어디서 나오랴. 더더구나 징용, 징병 문제로 그 당시 우리 민족을 시달리게 한 장본인과 그 동료들의 입에서, 입에서야.
      
      이 박사는 직접 그 일에 관련된 일은 없지만 김 주석과는 여러 차례 합석해 보았고 식사까지도 같이 나눈 일이 몇 번 있었고 공주(公州) 등지에 수행(隨行)여행까지 한 일이 있어서 김 주석의 일에 대해서는 아주 생소한 편이 아니다. 70 고령의 노인이니만치 새로운 세계의 정치체제에 그 관계 등에 대해서는 이해가 좀 적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부 오직 조국의 광복뿐이다. 젊은이 더욱 일부 이단분자같이 조국이 광복되면 나는 무슨 의자요, 너는 무슨 의자라는 이해타산 아래에서가 아니고 첫째도 무조건 독립, 둘째도 무조건 독립, 셋째도 무조건 독립, 오직 조국광복에 바친 이 노인 ― 지금 독립은 문 밖에 목매 걸고 여러 가지의 잡음 때문에 들리지 못하는 마당에 다만 우리는 주석 개인을 위하여서도 민망키 짝이 없다.
      
      독립은 분명히 약속된 바이요, 현재 문턱 하나를 넘지 못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이 현황에 춘추 70이니 또한 언제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게 될는지 이도 알 수 없다. 문 앞에 놓아두고 들이지 못한 채 별세하는 불행이라도 있다 하면 그 얼마나 분한 노릇이랴.
      
      × × × × ×
      
      독립이 완성되어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한 김 주석은 입국 이래 지금껏 오직 침묵을 지키고 이 휘돌아가는 시국을 탄식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당의 ××보의 기사에 얼마나 불쾌하였기에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뜨리고 꾸중의 말을 내렸을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그들의 욕설이라 상당한 욕설이었을 것은 짐작이 가나 역시 치지도외하고 아이싸움은 아이에게 일임하는 것이 역시 좋을 것 같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8일)
      
      
      (8)
      
    민군정기 한국 정치를 움직인 3인방. 왼쪽부터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하지 중장.
      그들은 일찍이 민족적인 온갖 행사를 ‘소시민적’이요 ‘비계급적’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그 뒤에는 일본 정책 협력자로 무장을 튼튼히 하고 우리 민족을 민족적 패열로 몰아넣은 무리들이었다.
      
      그 뒤 8·15로 세상이 한번 뒤집히자 이번은 도리어 민족운동자로 가장을 하고 3천만의 선두에 서서 삼천만을 연모하노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 그들에게 애족적(愛族的) 정성이 없으며 그들은 도리어 민족 파멸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 앞에 놓여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좌우합작이다. 그런데 이 합작문제에는 ‘신탁통치’라 하는 인풍이 걸려 있어 말썽을 부린다. 처음 신탁통치 문제가 조선에 뛰어들 때에 ××당(조선공산당을 의미―편집자註)에서도 그리 반대하는 의사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단 사흘을 지나지 못하여 신탁통치 지지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조선인적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내 나라를 남의 나라에 통치를 신탁하랴. 이 엄연한 민심에도 불구하고 ××당에서는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한 것이다. 그때에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지지’라는 속임수로 지지 태도를 표명하다가 이제는 아주 내어놓고 탁치 지지이다.
      
      내심(內心)이 조선의 땅을 위하여 탁치를 지지하는지, 혹은 단순히 온 국민이 반대하는 노릇이니 의(擬)로 뻗어 지지하는 것인지, 또는 더 단순히 어떤 딴 나라의 칙령에 복종하여 탁치 지지인지, 이는 우리가 알 길이 없으되 좌우간 온 조선 민족이 반대하는 줄 뻔히 알면서 이를 절대 지지한다고 한다.
      
      민족의 의사에 위반되는 것 ― 이것이 벌써 민족반역행위다. 소위
      
      ‘삼상 결의에 순종하여’
      
      이렇듯 순종을 잘하였기 때문에 8·15 이전에는 총독부 정책에 순응하여 일본제국 책(策)에 순응하여 ― 조선 민족과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측의 정책에 순응하면 언제든 민족반역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민족반역자의 무리가 70 생애를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친 이에게 도리어 민족반역자라 하니 이런 것은 다만 웃을 노릇이지 성을 내든가,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9일)
      
      
      (9)
      
      이 기회에 또 한 가지 잠깐 언급하고 싶은 일이 있다.
      
      우리가 일본인에게 가지는 노염과 불쾌감은 매우 크다. 우리의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노염은 더 커지고 불쾌감은 더 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교양을 스스로 돌아보아 공석(公席)이나 문자상에서는 그들을 ‘일인(日人)’ 혹은 ‘왜인(倭人)’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의 분한 마음은 분한 대로 우리는 우리의 교양과 우리의 예의를 스스로 자각하며 야비(野卑)에 흐르는 언사는 피하고 싶다.
      
      왜놈이란다고 그들(일인)의 지위가 더 떨어질 바가 아니요, 일본인이란다고 더 훌륭해질 바가 아니요, 다만 우리 자신의 교양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 지나지 못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좀 더 신사다워야 할 줄 안다.
      
      사담(私談)이나 작은 회석(會席)상에서야 아무런 언사를 사용한단들 관계 있으랴마는 문자상이나 공석상에서는 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이 야비의 문자가 일찍이 조선에 나타난 것은 문사 지망자들의 욕설 유행이 그 실마리였다.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욕설이 아니고 다만 출세의 사다리로 하는 욕설임에 이론도 없고 다만 무의미한 욕설이었다. 이놈 저놈 다만 욕이었다.
      
      “그놈은 케케묵은 소설 따위나 쓰느라고 건방지게 운운”
      
      소설을 쓰는 죄가, 즉 ‘놈’이라는 욕을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지금 한 글을 쓰는 나도 지난날 적지 않게 그놈 저놈의 욕을 먹은 사람이다. 이 나를 욕하여 그것을 토대로 출세한 사람도 뽑으라면 뽑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이 없고 무의미한 욕설이라 아무 통양(痛痒·아프고 가려움―편집자註)도 느끼지 않았고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욕설이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이번 해방 이후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서울 종로 네거리의 벽 신문(壁 新聞)에서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처음 벽 신문 욕설을 시작한 것은 해고당한 직공이었는데 그것이 차차 정당(政黨)으로 옮아가고 벽 신문에서 출판물로 ― 이렇듯 범위가 이동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품격과 교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삼가야 할 것이었다.
      
      ‘왜왕 유인(倭王 裕仁)’이라는 것보다 ‘일본 황제’라 불러주면 우리의 품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해지는가. 원수에게도 이러한 것을, 하물며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며 70 노인에게 향하여 정치적의 견해와 입장이 설혹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존경사 하나도 끼지 않고 더구나 야비한 욕설까지 가한다 하는 것은 당하는 본인은 별무 통양이요 도리어 가하는 사람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낮추는 데 지나지 못한다.
      
      지나가는 노인네에게라도 그러지 못하겠거늘 민족 지도자(그 정견의 상위는 차치하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은 그 필자(筆者) 혹은 설자(說者) 자신이, 존장(尊丈)도 모르고 길러진 성장을 폭로하는 데 지나지 못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0일)
      
      
      (10)
      
      요컨대 이번 ××보에 게재했다는 ××당 발표를 나는 직접 보지를 못했으니 그 말에 대해서는 아무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귀국 이래 침묵을 지키던 김구 주석으로 하여금 좀 더 참지 못하여 □□를 하지 아니치 못하게 한 데 대하여 노염이 인다.
      
      그것도 사실 민족을 사랑하는 어떤 단체에서 김 주석에게 대한 어떤 충고도 아니거니와 게재된 지면이 일정 협력자의 모임인 ××보요, 그 발원지가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현재 지폐 위조의 혐의에 걸려 있고, 민족 분열의 발원지인 ××당(조선공산당을 의미―편집자註)이라는 점에서 공평한 제 삼자의 노염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 글은 김 주석을 다만 옹호하자는 간단한 이유에서 쓰는 바가 아니다. 조선에서 문자화(文字化)한 욕설이 언제부터 어떤 필요상 어떤 경로를 밟아서 시작되고 성장해 왔는지 이 점을 규명하여 지금 또다시 차차 성행하려는 정황이 보이는 욕설에 대하여 독자들의 엄중한 감시와 통제를 부를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 붓을 드는 바이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욕설은 불순(不純)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이전에 단지 자기가 출세하고자 애매한 사람을 부풀어서 욕하면 그 시절이나 지금의, 단지 자기네 민족 반역의 행위를 책무하노라 취하기 위해 애매한 민족까지 붙들어서 욕하는 것은 불순한 동기가 매 한 가지다.
      
      그리고 상대자를 정정당당히 어른으로서 공경하지 못하고 악독한 욕설을 퍼붓는다는 것은 그들이 어른으로는 제외되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그러한 욕설에 속지 말자. 우리의 주장, 우리의 목표가 정당하다는 굳은 신념으로써 그런 반역자들의 외치는 잡음에 귀기울이지 말고 우리에게 거룩한 목표 ― 독립을 향하여 일로매진하자.
      
      칠십 생애를 다만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돌아온 우리의 거룩한 지도자와 우리 일반 국민을 이간 붙이려는 반역자들의 온갖 모략을 배제하고 우리의 그 지도자들은 우리의 베스트 심벌로 모시고 우리는 오직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자.
      
      이 땅에 신탁통치를 함께 들이려는 반역자를 말끔히 이 땅에서 추방하자. 이 땅은 이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만으로 사수하자. 일본에 협력하는 무리는 일본으로, 소련에 협력하는 무리는 시베리아로 모두 추방하고 애국자만으로 이 땅을 지키자.(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1일)
      
      
      <‘日人家屋’>
      
      (1)
      
       일본인의 주택이었던 건물은 미국 24군 숙사로 쓰겠으니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가고 집을 비우라는 명령이 매우 빈번하여 ‘가타가나(일본을 의미―편집자註)’ 주택문제에 허덕이는 시민에게 또 한 개의 두통거리가 생겼다.
      
      누가 물어보았다. “갈 데가 없는데 어디로 가라느냐”고. “대답이 ‘한길은 사람을 거절하지 않는다’”고.
      
      일본인의 집에 사는 사람을 분류하여 보면,
      
      1. 사고 든 사람(한 때에 규칙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1. 접수해서 든 사람.
      1. 회사 사원으로 사택에 든 사람.
      1. 일인에게 양수(讓受)받아 든 사람.
      1. 사글세에 든 사람.
      1. 무법(無法)하게 든 사람.
      1. 그 밖에 여럿일 것이다.
      
      군정청(軍政廳)에서는 한 때에 정한 규칙을 제정하여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때가 바야흐로 지방에 소개(疏開)하여 갔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서울로 돌아오며, 혹은 38 이북이며, 해외에서 오며, 또는 이젠 해방되었으니 서울서 살아보리라고 이사 오는 사람들로서, 서울에 집중되는 인구는 놀랍게도 많았는데 서울은 소개 때문에 적지 않은 집이 헐리고 자재 부족 등의 문제로 서울은 불가능한 형편이라. 일본인이 물러가도 미계(未計)된 집쯤으로는 이 많은 수효에 응할 수는 물론 없었다. 따라서 집값은 무섭게 올라갔다. 그때에 백배나 껑충껑충 올라갔다.
      
      일본인의 집이든 집(이하 간단히 일인의 집이라 부르겠다)은 점령군이 입성하기 전부터 성(盛)히 처분되었다.
      
      8·15 직후에는 성급한 일인들은 동산, 부동산 전부 버리고 값지고 경편(輕便)한 물건만 몸에 간수하고 제 나라로 도망한 자가 적지 않다. 혹은 동산은 지인(조선인)에게 헐가로 넘기고(혹은 양보하고) 부동산은 그 사람에게 맡기고 간 자도 수두룩하였다.
      
      이런 주류에 속하는 주택은 물론 연고자(이웃이든가 위임받은 사람)가 점령하였다. 그리고 일인의 집에는 대체 전화가 있고 수도, 가스, 전열등의 설비가 있는 관계상 그 집을 보관하는 조선 사람은 꽤 낡은 집을 팔고 일인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8·15 직후 며칠간 등기소에서 등기업무까지 해주었다 한다. 그러나 직후 한동안은 장차 점령군이 입성하면 어떻게 처리할지 감각이 가지 않아 일인들은 어서 도망하기로 상책을 삼고 재산 등은 버리는 값으로 처분을 하였다.
      
      미군이 입성하자 일본인의 신변의 안전도 보장되었다. 동시에 일인들의 처분하는 재산의 값도 나날이 올랐다. 무지한 행상인들이 일인의 집을 호(戶)별 방문을 하며 쓸 물건, 못쓸 물건 모두 사주어서 일인들은 그야말로 평상시에는 버릴밖에는 도리가 없는 깨진 컵이며 찢어진 아동 양복까지 원(元) 값(산 값)의 20곱, 30곱에 팔아넘겼다. 무지한 행상인들은 일인의 주머니에 돈을 듬뿍 넣어준 것이었다.
      
      집값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거저 버리고 도망치던 집이 시가(時價)의 약 1할(割), 2, 3, 4, 5할로 쑥쑥 올라갔다. 조선 사람이 사주지 않으면 그냥 버리고 갈 집이지만 조선 사람은 또한 자기의 사정이 급하니(모리배도 많이 암약하였거니와)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 손에 넣기 위하여 남보다 비싼 값을, 일인들은 내버릴 것을 비싼 값에 팔면서 미상불(未嘗不) 조선인의 마음 심보를 더럽게 여겼을 것이다. 내버려두면 조선의 국부(國富)가 될 돈을 경쟁적으로 자기네(일인)까지 갖다 바친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는 집(버리고 가야 할)을 달라 한다. 집은 제 나라(일본)로 빼 갈 수 없으되 현금은 일본 은행권이면 밀항 편에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어수룩한 조선인은 또 조선 은행권을 일본 은행권으로 바꾸어주는 편의까지 보아준다.
      
      이리하여 일본인들은 걸레며 해진 내복까지도 모두 고가로 팔아서 그 돈을 일본 은행권으로 바꾸어가지고 일본으로 밀송하였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5일)
      
      
      (2)
      
      일인가옥의 값은 나날이 올라갔다. 시가와 어깨를 겨누게까지 되었다. 그러므로 인기는 일인가옥이 꽤 높았다. 정결하고 □□ 전화에다 수도, 전등, 전열, 가스도 다 있고 부력(富力)이 조선인보다 나았으니 부속가구가 고가품(피아노, 전기, 축음기, 응접실)까지 겹친 점이 많고 이런 관계로 돈냥이나 있는 사람이랄까 개명한 체하는 사람들은 즉 일인가옥을 희망하였다.
      
      이런 때에 당국에서는 일인가옥 사는 법칙을 제정하여 발표하였다. 가로되,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합의되면 군정청에 그 뜻을 아뢰면 60일 이내에 가부 결정해서 통지할 터이니 그러면 값을 군정청에 지불한다. 결코 일인 본인에게 주면 안 된다”하는 것이다.
      
      요컨대 대금은 일인에게 지불하지 말고 군정청에 지불할 것, 값도 군정청에서 작정할 것이니 각자가 미리 작정하지 말 것 등이었다.
      
      아직껏 일인가옥을 사기는 사면서도 장차가 어찌될지 □□□ 안 하던 터에 이렇듯 공공(空空)한 때에 규칙까지 발표되니 이제는 마음 놓고 살 수가 있었다. 일인가옥의 인기는 더욱 높았다.
      
      그런데 집주인이 일인에게 집값을 주지 말라는 것이 좀 문젯거리였다. 일인은 조선 삼천만 가운데 누구를 택하여 제 살던 집을 물려주랴. 억지로 주거나 안 주는 사람보다 돈 주는 사람에게 물려줄 것이고 적게 주는 사람보다 많이 주는 사람에게 물려주게 될 것이다.
      
      그런 관계로 군정청에서는 ‘일인에게 돈 주지 말라 하지만 모두 이면으로 거주권에 대한 값 또는 부속 가구의 대금’의 명목으로 전일에 집 매매대금과 같은 정도의 돈이 일인의 손에 쥐어졌다.
      
      만약 장차 군정청에서 그 집의 값을 떼어서 지불하라 하게 되면 그(일인의 집을 일인에게 산 사람)는 일인과 군정청에게 두 번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은 살 것이 없고 신축도 할 수 없어 부득불 비싼 줄 알면서도 그리로 인기가 몰린 것이다.
      
      이리하여 일인가옥 거의다가 처리되어 일인은 나가고 조선 사람이 들고 집 장수의 손에서 굴러다니던 집들까지도 모두 새 주인을 만나서 낙착되고 이쯤 된 때에 돌연히 미국 국무성에서 열린 재산은 처분하지 못하리란 발표가 있었다.
      
      이렇게 됨에 미국인으로 된 조선 군정청은 무론 국무성 발표에 따를밖에 없다. 일인가옥 매매 규칙은 저절로 삭아버리고 말았다. 일인가옥의 소유권은 군정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위에도 말했거니와 당국에서는 일인에게 돈을 지불하지 말라 하였지만 사는 사람 측에 경쟁이 붙고 해서 자연 ‘거주권에 대한 배급’ ‘부속가구 배급’ 등의 명색으로 일본인에게 돈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인도 조선 삼천만 민중에게 역시 돈 많이 내는 사람에게 제 집을 물려주었다. 일인에게 돈 주고 사지 않았다면 일인은 그들의 심술로 집을 불 놓든가 부시든가 하고 가지 그냥 곱게 가지 않을 것이니 8·15 직후에 집 부엌에 폭발탄을 묻고 혹은 발화장치를 하고 달아난 그 심술로 보아서, 일인의 주택들이 오늘날 그냥 곱다랗게 보관되어 조선인이 쓰고 있는 것은, 조선인이 일인에게 돈 주고 사서 자기의 집으로 여기고 보관하는 경우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현재까지, 일인의 집에는 새 주인인 조선인이 들어서 조선인으로서의 보금자리를 펴고 자기네의 삶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군정청에서 발표하였던 일인가옥 매매 규칙은 국무성의 부결로 무효화되고 말았고 일인가옥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아주 근거를 잃게 되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6일)
      
      
      (3)
      
       집 한 칸이라 하여 조선 사람은 전통적으로 집 하나는 쓰고 살아야 한몫 사람 구실로 쳐준다. 그런데 일인가옥에 거주하는 사람은 제법 하나도 못 쓴 ― 말하자면 사람 몫을 아직 못한 셈이다.
      
      이것은 당국의 실책이니, 당국이 무슨 착오에서든지 간에 일인가옥 매매 규칙을 제정하여 그 규칙에 의거해 합법적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에게는 주택에 대한 어떤 보장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인하고 대하는 일이다. 가옥 매매 규칙이 국무성 취지에 따라서 취소된다 할지라도 당국에서 일단 규칙을 발표하여 그 규칙에 따라서 합법적으로 일인가옥을 취득하였던 사람에게는 그 가옥의 사용권이라도 보장해 주어서 법치국 백성으로서의 안전성을 보장해 줘야 할 것이다. 법에 따라서 정한 합법적 행위까지 뒷날 거부당한다 하면 국민생활의 안정을 어디서 구하랴.
      
      그런데 일인가옥에 든 사람의 주택 안전성은 완전히 없어졌다. 소유권자가 미국 24군이 필요하다 할 때에는 단 한마디의 통고로 언제든 쫓겨나가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주택이 되었다.
      
      일인가옥에 든 사람은 그것을 내 집으로 여기고 장차 조선 정부가 생겨서 처분할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집을 조선인의 생활양식에 적합하도록 수리하여, 혹은 개량하여, 혹은 나무와 꽃을 심으며, 정□(미군정을 의미―편집자註)의 배급이며 아동들의 학교문제로 모두 이 집을 표준으로 고치며 이 집에서 살 만년계획을 꾸미고 있는데 그들의 진정한 권한이라는 것은 겨우 24군에서 용인할 동안에 한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조선 사람의 주택에 대한 관념은 다른 나라 사람과 달라 한 집에 들게 되면 자자손손이 그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조선 사람이 일본인의 집에 들어서는 아직 아주 사(買)는 법규가 안 섰으니 사지는 못하나 장차 그 주택의 소유권이 조선 정부(장차 설)로 이관되는 날에는 당연히 연고자인 자기네(현재 거주인)에게로 올 것으로 믿으므로 ‘내 집’이라는 기분으로 집을 간수하며 관리하여 개량하며 장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불안을 느끼는 것은 이 집의 소유권이 군정청에 있으며 군정청에서는 안전거주의 보장을 주지 않는 점이었다.
      
      × × × × ×
      
      일인의 집을 도맡아 관리하며 집세를 받기 위하여 군정청에서는 예행기관으로 조흥은행과 신탁회사 등을 지정하였다. 그리고 예행기관과 임대차계약을 하면 얼마만치 마음 놓고 거주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마음 놓고 거주’라는 것은 무엇을 뜻함인지 매우 모호하다. 같은 조선인으로 협잡배, 모리배처럼 흉계를 꾸며 남의 물건 등을 집으려는 무리가 간간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것은 법률로는 넉넉히 대항하고 격퇴할 일이 있다. 일본인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가장 불안을 느끼는 것은 미군에서 쓰겠다 함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7일)
      
      
      (4)
      
    광복 후 ‘신탁통치 절대 반대’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여기 대한 무슨 보장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보장은 없다. 한때 군정청에서 매매 규칙을 세워 이를 발표할 때, 그 규칙에 의거하여 합법적으로 수속한 사람(조사기간이 60일간이고 60일 뒤에 가격을 통지한다는 규칙이 있지만 또 60일이 경과되기 전에 규칙 전체가 철폐됐기 때문에 대금까지 완불한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은 그 준법의 성의를 보아서라도 어떤 정도의 보장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무 악의 없이 아무 무리나 비행 없이 일인가옥에 들어서 정직하게 시민 생활을 경영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정도의 양심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가옥에 들어 사는 사람은 갑을(甲乙)의 구별이 없어 전전긍긍 마치 남의 □□□□ 보는(남의 집에 사는―편집자註) 사람같이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대체 무슨 죄, 무슨 신수가 있기에 그들은 그런 불안을 늘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가.
      
      × × × × ×
      
      군정청 당국에서는 장차 조선에 나올 장교들의(가족을 데리고 올) 숙소로 하기 위하여 현 거주자들을 ××(강제? 검열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註)로 집을 비우게 한다. 무슨 소유권자가 자기네 필요 때문에 내라 하는 것이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서로 마음의 갈등 마찰이 없도록 할 수는 없을까. 더욱이 약한 자로 학대받는 자는 늘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 예사로이 하는 일일지라도 나무랄 제 분하게 보고 원통하게 본다. 그런 조선인에게다가 네 집을 내가 쓸 데가 생겼으니 너희는 나가라로 명령하면 불만이 안 생길 수 없다.
      
      게다가 서로 말이 통하지 못하여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니 저쪽은 간단 명료하게 의사 표시를 하기 위해서 강하게 명령적으로 나오고 이쪽은 역시 간단명료하게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단연 거절의 태도로 나온다.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강제 수단, 위압 수단, 폭력 수단까지 하게 되어 의사는 더욱 소원해진다. 여기서 민간에는 “××(일제―편집자註)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는 원성이 은연중 생겨나서 차차 높아간다.
      
      “××시대만도 못하다.”
      
      이 말을 위정자는 단순히 흘려 넘길 말이 아니다. 그 원인을 규명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 본다. 그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수삼(數三)의 불평객에게서만 나오는 원성이 아니라 은연중 삼천만의 마음속에서 자라온 생각이다.
      
      경제문제로도 이렇듯 불안한 생활을 해본 일이 없다. 게다가 일시동인(一視同人)이 그들의 표면기치였던 만큼, 표면만은 우월 인종과 열등 인종의 대우차별이 적었다. 사상문제를 제외하고는 법치국 백성의 자유권을 한껏 즐겼다. 준법자는 법률이 보호해 주었다. 법을 아침에 세우고 낮에 고치고 저녁에 제거하는 변덕은 없었다. 그리고 선량한 시민 생활을 교란하는 나쁜 자에게는 용서 없이 벌이 내렸다. 사회는 어떤 구실 아래 정돈되고 정리되었다.
      
      그런 제도 아래에서 소심 의의하게 시민생활을 경영하던 사람에게는 ××시대만 못하다는 불평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이 땅은 조선 사람을 위한 땅이냐, ××××(‘미 국무성’이란 표현이 검열로 삭제된 듯 보인다―편집자註)을 위한 땅이냐는 의문은 누구의 머리에나 사무쳐 있는 의혹일 것이다.
      
      가족문제로 말할지라도 지금 집 한 채는커녕 방 한 칸을 구하기가 지난한 이 판국에 수십여 집에 향하여 한꺼번에 퇴거명령을 하니 ― 그래도 갈 데가 없노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한길은 사람을 거절치 않는다’고 가르쳐주는 두 번째의 결론이 나올 때는, ××(미군을 의미―편집자註)이 대답을 대신하는 형편이니 과연 이 땅은 뉘 땅이냐.(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8일)
      
      
      (5)
      
      변절기요, 전염병 절기에 수십 세대의 수백 명 식구가 길을 잃고 한길에 방황하는 형편이니 전재민(戰災民)에, 이재민(罹災民)에, 수재민(水災民)에 축출 제민까지 치게 되었구나. 이것을 허투루 볼 문제가 아니요, 유유한 사회문제다. 어느 때는 일인의 집은 살 거라 하고, 어느 때는 못 살게 하고, 어느 때는 계약하고 세(貰)들이게 하고, 어느 때는 그 집 내가 써야겠으니 내놓으라 하고 ― 마치 장난이다.
      
      임대차계약의 법을 발표하여 모두 계약제로 한 것이 겨우 두 달도 못 된다. 그 집에 살고 싶으면 그 집에 든 날부터 셈을 하여 오늘까지의 집세를 내라 하여 1년이 가까운 집세를 한꺼번에 받아내고 그 수속이 끝나자마자 수십 건을 추려내어 집을 비우라 하는 것은 집세를 받기 위한 ××적 모략이라. 훼방이란들 무엇이라 변명하랴.
      
      물론 ××(미군정?―편집자註)에서 집이 필요하다면 아주 쓰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필요 이상의 많은 집을 차지하고 있는 등의 모리배 혹은 아직 임대차계약도 하지 않고 있는 수상한 사람, 이런 사람을 잘 조사해도 상당히 많을 것이요, 또는 다른 방도도 연구하면 무슨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거주자의 사정이라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직 이것은 ×××(미군정―편집자註)의 재산이라는 선입견뿐만 가지고, 언제든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일을 처리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필자인 나도 일인가옥에 들어 살다가 이번에 쫓겨날 운명에 처한 사람이다. 본시 도시 소재로 수년 살던 집을 잃고 해방 후 다시 서울로 오니 이 육척을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집을 하나 구해보려고 쩔쩔맬 때에 그때 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이던 모씨가 그 소문을 듣고 내게 집 한 채를 알선해 주었다.
      
      “그대가 조선어와 조선문학의 길을 지키느라 30년간 고절(苦節)해 국가로서 마땅히 표창할 일이지만, 그건 현재 할 수 없고 집 한 칸도 없이 지금 공중에 뜬 형편이라니 역시 불안할 수 없다. 현재 군정청에서 일본인 큰 회사를 접수하여 그 사택이 100여 채가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한 채 골라잡으라. 물론 나 개인으로 하는 일이요,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로다.”
      
      이리하여 어떤 일본 회사 사장의 사택이었던 집을 한 채 빌리고 이제 마음 놓고 내 가족을 데리고 살아오는 것이다.
      
      물론 일인에게 산 바도 아니요, 군정청 명령에 쫓아서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니요, 특히 점령한 바도 아니요, 그저 얻은 집이지만 장차는 조선 정부가 생겨서 살라 할 때에는 살 것으로 알고 마음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에 일종의 불안은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이 종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어차피 쫓겨나는 마당에 한마디의 불평을 안 할 수 없어서 몇 자 써본 것이다.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요컨대 실패의 정치다. 지금 일인가옥 문제는 극히 국한된 일부분의 문제인 듯, 따라서 가벼운 것인 듯 생각할는지 모르나 요컨대 주변의 상황이며 감정은 도외시하고 ××(권력?―편집자註) 본위의 정치를 베풀면 그 정치는 좋은 정치가 아니다.
      
      (출처=《家政新聞》1946년 7월 29일)
      
      
      (6)
      
      지금 이 집을 잃으면 우리 집 몇 식구는 사실 공중에 뜬 살림이 된다. 이즈음 그 문제로 며칠째 잠도 못자고 근심에 쌓여 있다. 나뿐 아니라 다 그러하리라. 늙어가는 몸이 일생을 오직 문학과 국어 사수에 바치고 그 노력을 천하가 모르는 가운데 그래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집 한 채 얻어 잡고 늙마(‘늘그막’의 준말―편집자註)에 몸 의지할 데가 생겼다고 안심하고 있었더니 권력자의 ××는 이 늙은이의 집 한 채조차 용인하지 않아 가족 데리고 한길로 나가라는 것이다.
      
      이 강권겁탈(强權劫奪)에 대해서는 반항할 도리도, 대항할 도리도 아무것도 없어 다만 유유복종(愉愉服從)의 한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과거 30년간 일제의 그 무서운 탄압과 방해를 헤치고 노력하여 조선문학의 길과 조선어 생명유지의 공로에 대한 국가의 보상도, 국민의 보상도 못 받고 오직 군정청 모 관리가 행할 수 있는 개인적 호의조차 가엾게도 유린되어 사글세 집 한 채조차 못 쓰게 되었다. 이 주택난이 최극도에 달한 서울 안에서 일곱 식구 가족을 수용할 만한 집을 어떻게 어디서 구하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하시던 예수의 말씀이 글자 그대로 오늘날 나에게 임(臨)하였다. 나만 아니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쫓겨나는 사람의 운명은 전부가 비슷하리라. 정치는 정당해야 한다. 정치는 피치자(被治者)의 복지를 주안(主眼)삼아야 한다. 일본인 가옥에 든 조선인 퇴거문제가 일부에 국한된 작은 문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여기도 근본적으로 잠재해 있는 권력자와 무력자, 행정자와 복종자, 강자와 약자라는 점에 눈을 두어 권력자에게 횡포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 복종자에게 억울하다는 감정이 들어가지 않도록, 썩 잘 주의하여 일을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하지 않아서 권력자는 권력과 권리를 그냥 강행하면 복종자는 약자인 만큼 거침없이 실시도 되고, 실천도 될 것이나, 그 대신 약자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원한만은 강자의 권력으로도 말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아무리 큰 공적이 있었다 할지라도 약자에게 원한이 생길 때에는 과거의 공적에 대한 감사의 일은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이요, 새로 자리 잡은 원한만 가속도로 커갈 것이다.
      
      이 점을 잘 생각하여 원한 길에서 피하도록 ― 이리하여 과거의 공적을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강권자는 강권자로서의 노심(勞心·마음으로 애를 씀―편집자註)을 하여주기를 바라는 바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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